갈릴리 호수를 내려다 보는 산기슭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군중들, 그리고 병을 고치려는 환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내일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일 걸치고 나갈 옷이 없어서 옷에 대하여 염려해야만 했습니다. 오랜 병을 가지고 살아온 환자들, 그들은 하루 하루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내일 또 맞이 할 하루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때 마침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참새들은, 유유히 자유스럽게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때 마침 갈릴리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들꽃들은 아름답게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새들과 꽃을 바라보며 얼마나 부러워 했을까요?
(마태 6:28-34)
내가 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윽한 향기를 뿜으며 곱게 피어 있는 저 꽃들, 나도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보며 부러워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들은 저 참새나 백합화가 부러워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한 존재가 아니더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리고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백합화를 어떻게 자라고 있습니까? 어느 산골짜기에 말없이 피어 있는 백합화! 거기에는 자기 전체를 하느님 품속에 위탁해 버린 안도감이 깃들여져 있다. 어머니 품에 안기어 아무 근심 없이 고요히 잠든 어린애와도 같이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대자연의 품에 안기어 거기에 뿌리를 박고 양분을 빨아들이며 고요히 향기를 뿜는다. “도대체 언제나 봄이 올까?” 조급히 묻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봄은 으레히 오리라고 백합은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 지루한 장마가 개어 햇빛을 볼 수 있을까?” 백합은 묻지도 않습니다. 다만 말없이 조용히 기다립니다.
들에 핀 백합화! 거기에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단순하고도 완전한 자기위탁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뿌리를 박고 말없이 대기에 향기를 뿜는 것, 그것이 백합이 살아가는 모습니다. 그것이 백합의 생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백합의 생리에서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백합은 대지에 뿌리를 박고 최선을 다하여 양분을 빨아올리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주신 대지에서 양분을 빨아올림으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새가 유유히 공중을 날고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날개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백합은 백합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자기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자기를 완전히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인간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는 생활이란 자기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어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저절로 굴러들어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게서 주신 능력과 내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후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생활입니다.
병을 고치는 데 있어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연후에는 완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환자와 의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는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염려가 공연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마치 젖먹이가 말하기를 “내가 그래도 굶어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내가 배고플 때 마다 울고 조르기 때문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울고 조르지 않더라도 그의 어머니는 때가 되면 으례히 젖을 먹여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할 일은 그저 어머니를 믿고 그 품에 안겨 젖을 빨기만 하면 됩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길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
우리 인간은 오늘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으면서 염려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는 내일에 대한 염려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주어진 여건에서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그 후는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살 때 우리들의 백합화나 공중을 나는 새와 같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