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목마르다
  • L-282_공조회.png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9:28)

    기다시라가와(北白川) 교회 창립 60주년 기념회에 초대를 받아 1995년 4월 29일 교토를 가게 되었다. 기다시라가와 교회는 내가 일본 교토(京都)대학 유학시절에 다니던 교회이고 또한 어려서 유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견신례를 이 교회에서 받은 바 있다. 기념회는 일본 크리스찬 아카데미 관서(關西)세미나 하우스(우리 나라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있었는데 주위에는 아름다운 경치와 명소에 둘러싸인 조용한 회의 장소였다. 교토뿐만 아니라 과거에 교인이었던 회원들이 일본 여러 곳에서 모여왔다. 나는 첫날 오전에 약 1시간 20분 가량 강연을 하게 되었다. 현재는 오가사하라(小笠原亮一) 목사가 담당을 하고 계시는데 내가 있을 당시에 목사님이었던 오꾸다(奧田孝成) 목사님이 93세의 노령으로 멀리 요꼬하마로부터 저를 만나러 오셔서 반갑게 만나뵐 수 있었던 것은 감격적이었다. 오꾸다 목사님은 이번에 무리해서 오셨던 탓으로 그 후 감기같이 앓다가 6월 2일 소천하셨다.

    기다라사가와교회와 향린교회

    기다시라가와교회는 향린교회와 유사한 점이 참 많다.

    전쟁 중에는 사와자끼(澤埼堅造), 와다(和田正) 두 분의 만주, 몽고를 향한 선교자를 배출하였으며 이들 마음속에는 일본이 동양의 여러 민족에 대해서 감행하고 있는 일본의 죄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써 조금이라도 이것을 대상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이 박정희 정권 하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기다시라가와교회의 고꾸다 목사, 와다선생, 이이누마 교수 등 5년은 미국의 유명한 신문인 뉴욕 타임즈지 1974년 5월 5일자 신문 1면 전면에 의견 광고의 형식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인을 압박하고 있는 박정권을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성명서 때문에 와다선생은 부산을 통해 한국을 방문하려다가 입국을 거절당하여 돌아간 일이 있다.

    오꾸다(奧田) 목사

    이번 기다시라가와교회 창립 60주년 기념 예배에 멀리 요꼬하마에서 93세 노령으로 무리하시면서 참석해던 오꾸다 목사님이 감기 같이 미열이 나면서 앓다가 지난 6월 2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기념에 배에 참석한지 1개월 좀 남짓해서 돌아가신 것이다. 오꾸다 목사님은 1935년에 기다시라가와교회를 창립하고 1983년에 이르기까지 48년간 일평생을 이 작은 교회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는 사법관이 되고자 경도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지만 모리 아끼리(森明, 일본 공조회「共助會」의 창시자)라는 분에게 감동을 받아 목사가 되었다. 그는 아무 생활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10명의 동지와 함께 기다시라가와교회(北白川敎會)를 창립하였다. 창립 40여년이 지나도록 세로 든 일본 가옥에서 다다미 방에 접는 의자를 놓고 예배를 드렸다. 내가 경도에 있을 때에는 예배에는 약 20명이 참석했다. 근래에 와서는 70명 가량이 되었다. 그러나 출석자의 수를 세는 일은 없었다.

    • 향린교회가 6년간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다가 신중한 논의 끝에 기독교장로회(基長)로 들어간 것 같이 기다시라가와교회도 5년간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고 예배 공동체로 있다가 독립교회로 나갈 것인가 교파에 속할 것인가를 기도하며 깊이 생각하다가 일본기독교단으로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 향린교회가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원중 열성 회원의 모임이었던 일신회(一信會)가 모체였던 것같이 기다시라가와교회도 교토 대학의 열성적인 기독자의 모임이었던 공조회(共助會)가 전신(前身)이 되어 창립되었다.
    • 향린교회가 6인의 신앙 동지와 그 가족 13명이 모여 같은 울타리 안에서 살면서 초대 기독교적 생활을 연상하며 그 당시의 뜨뜻미지근한 교회에 도전하며 출발했던 것 같이 기다시라가와교회도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가정적, 복음주의적 교회, 전투적 교회로서 출발하였다.
    • 향린교회가 평신도 교회로서 각자가 전생활(全生活)을 통하여 목회자작(牧會者的) 역할을 하면서 사회를 향해서 선교활동을 한 것 같이 기다시라기가와 교회도 목사 혼자에게만 전도를 맡기는 교회가 아니라 전 교인 사제주의적(司祭主義的) 역할을 하면서 참여하는 교회로서 출발하였다.
    • 향린교회가 처음 동지를 4명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했던 것 같이 기다시라가와교회도 처음 오꾸다 목사가 2번, 다른 사람이 나머지를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였다고 한다
    • 향린교회가 교회는 비록 작으나 독재정치와 군사 주의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싸워 온 것 같이 기다시라가와교회도 비록 작은 교회일지라도 태평양전쟁 중, 군사주의, 국가권력이 막강하던 시절에도 일본의 다른 것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였으며 천황 제도, 신사참배문제 등에 대해서도 비체제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오꾸다 목사는 한번도 교인을 끌어 드리기 위하여 전도 집회를 한다거나 친목회를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주일예배 때는 흑판에 직접 백으로 찬송가의 장수, 성경 구절 설교 제목을 썼다. 설교 자체가 성경 공부 같았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지만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나뭇잎과 꽃과 열매 뿐이다.

    1주일에 한번 이상은 교회에 오지 말라. 나머지 6일간은 각자 자기의 생활의 현장에서 자기의 신앙 생활을 진실되게 살아라 하는 것이다.(물론 집에서 성서 읽기, 기도는 열심히!) 교회의 재정이 그렇게 어려웠지만 그 어려운 재정 중에서 열하(熱河, 중국동북부)선교를 위해 계속 현금을 하였으며 이 작은 교회에서 사와자기 씨와 와다 씨 같은 열하의 선교자를 두 사람이나 배출하였다.

    전쟁이 한참 극렬한 시기에 국가에서는 예배 중에 "국민의례"를 거행할 것을 강제하였으나 기다시라가와교회는 단연 이 것을 거부했다. 교단에서는 전쟁 협력 체제를 강화하여 위문품 보내기, 비행기 헌납 운동을 하도록 촉진하였으나 기다시라가와교회는 그 것을 끝까지 순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군의 점령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중국 백성들을 위하여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이이누마 지로(飯昭二郞, 현재 경도 대학 명예교수)씨가 8년간 월남전을 반대하는 데모를 매월 한번 80회 이상 경도의 제일 번화가에서 벌였는데 그가 학회에 출석하느라고 2회 데모를 빠지게 되었다. 그 때 오꾸다 목사가 "내가 네 대신 데모에 나가겠다"고 하면서 70세의 늙은 나이에 가장 추운 12월, 1월의 데모를 대신하였다고 한다.

    교회당 건축에는 끝내 반대해 오다가 부인이 병석에 눕게 되어 의사의 권고에 어쩔 수 없이 근처의 작은 주택을 사서 교회로 사용하게 되었다. 오꾸다 목사는 "외골수의 길(一筋의 道)"이라는 뚜껑이 덮어질 때「이 사람은 한 평생 그리스도를 사랑하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일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마음에 원했는데 지금 83세가 된 오늘 날에도 그 염원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그 후 10년이 지난 93세에 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사와자끼 (澤崎) 선생

    "내가 목마르다"(요한 19:28)이 성경 말씀은 1883년 옥스퍼드대학 출신의 의료선교사 해롤드 소오휠드가 중국전도 도중에 쓰러진지 1년 반이 지난 1885년 2월 4일 밤 캠브릿지의 젊은 7명의 학도가 그의 뒤를 따라 중국을 향해 떠날 때 고별 강연에서 그 대표인 스탠리 죤스(Stanley Jones)에 의하여 읽혀진 성경 구절이다.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예수의 신음은 소리가 아직 들리고 있다. "내가 목이 마르다."는 주님의 신음 소리가 중국인 중에서, 인도일 중에서, 아프리카인 중에서 들리고 있다. 주님이 목타하시는 것을 축여 드릴 자는 아무도 없느냐? 주님이 목타하시는 이 신음 소리를 못 들은 채하고 지나가려고 하고 있는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의 모습을 좀 보아라.

    이 말을 남기고 그들은 다음날 2월 5일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그 후 상당한 선교의 성과가 있어서 70명의 상의 선교사와 7~8백명의 이상이 신자가 생겼으나 1900년 6월 소위 권비사건(拳匪事件)으로 인하여 그들의 대다수가 아마도 폭도의 습격을 받고 학살당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사와자끼 씨는 이 엄숙한 하느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1942년 4월말 기다시라가와교회에서 고별설교에서 "내가 목마르다"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나도 만주 몽고의 광야에서 "내가 목마르다"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저 대륙을 향해 간다고 말했다.

    일본이 잘못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명목 하에 패권 국가가 될 것을 꿈꾸고 있을 때 사와자끼 씨의 눈은 이웃나라에 대하여 저질러지고 있는 동족의 죄과를 조금이라도 배상하기 위하여 그는 아무도 가지 않는 버림받은 땅 몽고를 향하여 떠났던 것이다.

    기다시라가와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 외에는 자유 독립"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체의 권위,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반면 그리스도의 뜻이라면 만주, 몽고를 향하여 생명을 내걸고 주의 길을 뒤따라 갔다. 그는 경도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가 경도 대학 인문과학 연구소의 촉탁으로 있었는데 얼마든지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자리를 내놓고 춥고 삭막한 몽고 전도로 떠났던 것이다. 그는 더욱 깊숙이 오지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 품에 안겨서 자기를 떠나 보냈던 어린 자식이 폐렴으로 죽어 교인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죽은 애를 이름은 아라다(新)였다.)

    「아라다(新)의 무덤에서

    내가 여행길에 나설 때
    엄마 품에 안겨서 나를 떠나 보낼 때
    나는 그를 돌아다보지 않았으니
    그 것은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나이기에

    최후의 5분간 동문(東門)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제는 집에 가까이 왔구나 하고
    피곤한 내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집에서는 죽은 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흰 관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둘러앉아 기도하는
    틈 속에 소리 없이 끼어 들어가 기도 속에서 감사하였다.

    작은 여행길에 작은 주검이 바쳐졌도다.

    미편한 애비를 이곳에 못 박기 위해서
    이 애는 작은 무덤을 준비하였구나.

    너무나 기이하고 엄숙한 하느님의 뜻이요
    숙연히 옷깃을 바로 할뿐이니
    전도는 천국의 업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아아 그리스도에 업혀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무엇이 일어나도 내 마음 편하여라.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
    이 것을 생각하고 이것을 전하리니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창문이다.

    묘표의 양면에는 바람이 차갑다.

    그날 밤 사와자끼 선생은 사랑하던 애의 관 옆에서 그의 손을 붙잡고 잤다고 한다. 그 다음날 화장을 하였으나 뼈를 줍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것은 자기들도 어차피 만주 땅에 묻혀 흙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였다. 그 서산(西山)에 화장하고 묘포를 세웠다. 사와자끼 선생은 그 때 까지 동산(東山)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그 후로는 4 km나 떨어진 이 서산(西山)에서 매일 아침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우리들은 다만 주의 뒤를 따를 뿐이니
    주님은 오늘도 앞서 가고 계시다.
    아! 주님. 주님은 어디로 가시나이까?
    돌아보시는 주님의 시선은 얼마나 진지하고 자예로우신지
    주님!
    주님은 오늘도 씁쓸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나이까?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까운 몽고를 향하여 더 깊숙이 오지로 들어갔는데 그 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다. 순교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내가 목마르다"하는 주님의 신음 소리를 계속 좇아가다 보니 결국 몽고였고 그것에서 그는 순교하였다.

    와다(和田 正) 목사

    와다(和田 正) 선생은 경도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학교 선생을 하면서 한국 중학생들을 집에 모아서 성경 공부를 지도하였는데 그 학생들 중 한 사람이 일본 가와사끼에서 목회를 하면서 재일 한국인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고 잇는 이인하(李仁夏) 목사이다.

    와다 선생도 오랜 기도 끝에 1945년 4월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전 사와자끼 선생의 뒤를 따라 만주로 전도를 났다가 거기서 전도 활동을 시작하자 현지 소집을 당해 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전쟁이 끝나자 일본으로 귀국하여 마쯔모토(松本)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돌아가시면서 유언을 통하여 향린교회에 헌금을 하였다.

    그는 마쯔모토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일제시대에 일본이 식민지 정책하에 저지른 여러 유적지(특히 제암리교회)를 찾아보며 마음 속 깊이 일본이 저지른 죄과를 하느님과 한국민 앞에 회개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였으며 어떻게 하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 이 깊은 골짜기를 메울 수 있을까 하는 기도로 하느님께 드렸으며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밖에는 그 길이 없음을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간증하고 있다(갈라디아서 3:26~28).

    오가사와라(小笠原亮一) 목사

    현재 기다시라가와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오가사하라 목사는 경도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12년간 기다시라가와교회의 목회자로 있으며 공조회 잡지에도 많은 글을 쓰고 있다.

    그도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재일 한국 동포들을 위해 20여년 동안 많은 일을 하였으며 일본 글자를 읽지 못하여 고생하는 재일 한국 부인들을 위하여 "어머니 학교"를 만들어서 일본말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한국에도 여러번 방문하여 일본 식민지 정책 하의 한 국민이 받았던 학대에 대하여 그 실상을 탐사하여 일본 교인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지금 61세가 되었는데 나머지 여생을 일본에서 가난하고 낙후된 북방에 있는 자기 고향인 아오모리(靑森)에 가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생각을 하고 있다. 늙어서 가장 추운 북극에 가서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은 아니지만 사와자끼 선생이 추운 열하에 가서 선교하다가 순교를 한 것을 생각하여 자기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북극의 눈 속에 파묻히기를 기도 가운데 결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십수년 동안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다가 견디다 못해 자살한 젊은 친구가 죽기 반년 전에 "아오모리에는 교회가 적어요"라고 그에게 한 말이 자기에게 남긴 유언으로 받아 들였다. 그의 말은 언제나 가슴속에서 사무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도 무류아마에 가서 기도하는 가운데 아오모리를 향하는 그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지는 듯하다.

    이이누마 ( 飯沼 )교수

    기다시라가와교회 교인이면서 현재 경도 대학 명예교수인 이이누마 지로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사회적 약자, 핍박받는 약소민족, 특히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하여 비판하는 많은 글을 써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매달 1번씩 80회 이상 제일 번화한 거리에 나가서 반전 데모를 하였으며 박정권 시절에는 동아 일보 지원 운동, 미국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독재정권을 돕지 말라는 성명서 등을 내는 등 정의를 구현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는 농업 경제를 전공한 경도 대학교수로 재일「조선인」이라는 제목으로 많은 저서를 냈다. 그래서 같은 일본인이나 교인으로서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일본 교회도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교인이 많기 때문이다.

    기도의 산 우류야마(呱生山)

    기다시라가와교회가 사와자끼, 와다(和田) 선생 같은 헌신적인 열하(熱河) 선교지를 배출하게 된 것을 그들이 진지한 기도 생활의 결과하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에 그 두 사람이 열하(熱河)선교를 결심하기까지 끊임없는 기도가 이루어진 우류야마를 찾아가 보았다. 성북동 뒷산 정도로 낮은 산 기슭인데 거기서는 멀리 교토 시가 내려다 보였다. 사와자끼 씨는 1년 반 동안 매일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결국 만주, 몽고의 선교의 길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번에 산을 올라가 보면서 내가 기다시라가와교회에서 받았던 이 기도하는 전통을 소홀히 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과 행동하기 전에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일깨움을 받게 되었다. 기도하는 것은 자기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조용히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을 의미한다.

    사와자끼 선생은 "기도가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에는 특히 기도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하는가(to do)보다 더 하느님 앞에 어떻게 있는 가(to do)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된 줄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라는 것은 물론 성서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서를 통하여 받은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 복종할 것을 결심하는 과정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우리 주님의 기도를 생각해보자.(마태 26:39)

    기다시라가와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 외에는 자유 독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일체의 권위,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반면 그리스도의 뜻이라면 만주, 몽고를 향하여 생명을 내걸고 주의 길을 뒤따라갔다. 기다시라가와교회가 사와자끼, 와다(田)같은 헌신적인 열하(熱河) 선교자를 배출한 것은 그들의 진지한 성서 연구와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이 기다시라가와교회의 전통과 역사는 우리 향린교회와 통하는 데가 많다. 내가 이번 기다시라가와교회 창립 기념 강연을 하는 끝머리에 향린교회 홍 목사께서 이 같이 전통과 역사가 비슷한 두 교회가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 생각을 나누며 격려해 나가면서 양국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데 협력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스밍 서로 노력해보자고 하였다. 홍 목사가 교토에 오시면 기다시라가와교회뿐만 아니라 교토 부근의 여러 교회들의 연합 집회를 개최하여 남북통일의 문제 등 여러 가지 강연을 부탁드리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 기다시라가와교회 창립 기념회에 참석하여 그들의 뜨거운 주안의 우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한국과 일본 사이의 장벽, 그리고 이보다 더 좋은 우리 남북간에 놓여 있는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밖에는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1995. 7. 16 향린강단)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Goto Family Home
Copyright ⓒ 2011 Sukchun & Rorobrain. All rights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