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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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시라가와교회(北白川敎會) 60주년 기념 집회에 저와 집사람을 초청하여 주셔서 함께 이 집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날까지 살아남아서 생전에 이 같이 기념할 만한 날을 여러분과 함께 맞이할수 있게 하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오꾸다(奧田)선생님과 다시 한 번 만나 뵐 수 있게 된 것을 무엇보다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자식이 동경에서 소아심장학의 연수를 받기 위해 일본에 오는 기회가 있어서 제가 늘 말로만 들려주던 이 기다시라가와교회를 직접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생 긴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오가사와라(小笠原) 선생과 이번 방문에 대하여 상의를 들렀을 때는 단지 이 집회에 참석하여 여러분께 간단한 인사의 말씀이나 드리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스케줄을 보니 오전 중 가장 중요한 시간에 제가 한 시간이나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알고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내용은 1992년 3월에 서울에서 개최된 일한 기독교공조회(共助會) 수련회에서 말씀드렸던 내용과 중복되는 점이 상당히 있으므로 그점을 미리 양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일본을 떠난지가 이미 5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일본말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아 서투른 점이 많을 줄 생각합니다. 그런 점이 있으면 애교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신앙생활의 양상

    나는 1923년(일본 大正 12년), 관동대지진(關東大震災)가 일어난 해에 지금은 북한에 속하여있는 황해도에 태어났습니다. 금년으로 제 나이가 72세가 됩니다. 그 72년 중 22년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살았고 그 후 나머지 50년간,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이 되겠습니다 만은 조선이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지독한 독제 정권, 군사 정권의 통치하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 같은 피압박의 역사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민족에 있어서의 신앙생활의 양상은 보통 평탄한 역사 속에서 살아온 민족에서와는 달리 한 개인의 구원보다는 자기 민족의 구원, 자기완성에 대한 문제보다는 구조악에 억눌려 고통 받고 있는 동족에 대한 문제가 전면에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양상은 그리스도인이 각자가 처하여 있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나가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과는 전혀 다른 역사 속에서 살아오신 여러분들 앞에서 제 자신의 일방적인 말씀만 드린다는 것은 너무나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은 그 점 관대한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식민지 통치하의 중학교 시절

    나는 초등학교(그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 있는 숭실(崇實)중학교라는 사립 기독교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3학년 때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하여 숭실학교는 폐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학교는 공립중학교로 되어 일본 학생과 조선 학생이 공학(共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신사참배, 일본어 사용, 창시개명 등 강요당하게 되고 군사훈련이 극심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철야행군을 하는데 약 백리나 되는 길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총을 메고 행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끝에 가까워지면서 학생들은 너무나 지쳐서 반은 졸면서 무의식 중에 걸어가면서 앞에 가는 학생과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그 졸음을 깨기 위하여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조선말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사를 부쳐서 부를 수는 없어서 입안에서 허밍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일본 교사가 '너회 놈들은 입안에서 실컷 조선말을 썼을테지" 하며 큰 소리로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이 노래 조차도 공공연이 자기 말로 부를 수 없는 자기 말을 빼앗긴 생활을 강요받았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피박

    나는 중학교 시절 평양에 있으면서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를 다녔습니다. 그 교회는 여러분들 중에서 들으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기철(朱基徹)목사님이 계신 교회였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닐 시절에는 주목사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것 때문에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어서 직접 목사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주목사님이 감옥에서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가 하는데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코에 물을 부기,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를 끼우고 비틀기, 참대꼬치로 손톱사 이를 쑤셔서 손톱을 건들건들하게 만들기도 하고 팔을 뒤로 묵고서 공중에 매달기(비행기 태우기) 등 온갖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주목사를 감옥에서 내주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다른 설교는 다 좋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만은 해서는 안될 것이요"하며 엄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 설교에서 주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다시 재 수감되었습니다. 그 때 주목사의 사모님은 목사님을 감옥으로 보내면서 "당 신! 마음이 약해지면 안됩니다. 글까지 참고 싸워주세요"하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 2백여 교회가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 때문에 문을 닫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천명의 교인이 투옥되고 50명이 옥사를 했다고 합니다.

    일본에 건너와서 본 일본

    조선에 있는 동안 이 같은 식민지 정책하의 민족적 피박을 눈앞에 보면서 살아왔던 내가 일본에 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이 것과는 아주 다른 일본의 일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야마구찌고등학교(山口高等學校, 구제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와보니 접촉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그리고 인정이 넘쳐흘렀습니다. 경찰도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있다하더라도 국민에 대하여 비교적 부드러웠고 친절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대하는 경찰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야마구찌고등하교 재학 중에는 호리 신이찌(堀信一)선생 댁에서 토요일마다 성서연구 모임이 있어서 나도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임에 참석하여 같은 하느님을 섬기며 같은 성서를 읽고 같은 곡조의 찬송가를 부를 때 나는 마치 고향에 와있는 것 같이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경도대학(京都大學)의 자유로운 학풍

    1943년, 이때가 종전 2년 전 이었습니다 만은, 야마구찌고등학교을 졸업하고 경도대학의학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내 나이 바로 20세였습니다. 이 때 한참 전쟁 중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경도대학은 일본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전통 있는 대학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경도대학의 이학부와 공학부에 조선 사람으로 정 교수가 두 분이나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조선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성대학에는 조선 사람에게는 기껏해야 강사정도 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경도대학은 자유로운 학풍을 가진 대학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당시 매달 초에는 학교마다 천황의 칙어(勅語)를 봉독하는 의식이 시었습니다. 이전에 고등학교에서 칙어를 봉독하는 식이 거행될 때에는 칙어를 모신 함을 머리보다 높은 자세로 조심조심 처 들고 강당까지 와서 봉독한 후에는 다시금 안치소에 모셔다 놓고야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의학부에 들어가서 해부학 강의를 받게 될 때의 이야기인데 그 해부학교수는 칙어의 두루마리를 한 손에 들고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그 것을 읽고서는 책상 위에 놓은 채로 한 시간 강의를 끝마치고 나가면서 다시 한 손에 그 두루마리를 들고 교실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조선에서 이렇게 하였다면 불경죄로 문책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풍을 보면서 경도대학은 과연 다르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조선장학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회는 조선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강화사업도 담당하고 있는 기관이었습니다. 어느 봄 방학이었습니다. 이 조선장학회의 직원이 경도대학을 방문하여 조선학생들을 고급 중국요리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무슨 일로 초대하는 것일 가하고 가보았더니 동경에 있는 조선학생들은 다 봄 방학에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참배하였는데 경도에 있는 여러분들도 이 방학을 이용하여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이런 식의 이야기였으나 사실은 반 강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경도대학 학생과의 선생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는데 이 장학회사람의 말이 끝나자 그 학생과 선생은 '신사참배는 가고 싶은 사람만 가면 된다.' 고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출석했던 학생들은 식사만 푸짐하게 대접받고 한사람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전쟁말기라 신문지상에서는 '대본영 발표(大本營發表)'라고 하면서 언제나 일본군의 혁혁한 전과를 보도하고 있었으나 대학 강의실에서는 솔직한 일본의 실정을 흘러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안 되겠다. 눈을 뜬 사람과 눈이 먼 사람과의 전쟁인 것을" 이것은 미국에는 레이다 장치가 있었는데 일본을 없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솔직한 내용을 교수들은 솔직히 이야기하였습니다. 전쟁말기에 군국주의가 위세를 부리고 있을 때에도 경도대학에는 이 같은 자유스런 분위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학풍의 자유로움이 전쟁 후 노벨상을 받은 학자의 대부분이 경도대학 출신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경도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에 대해 지금도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경도에 왔던 것이 참으로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기다시라가와교회에서 신앙고백(견신례)

    다음 말씀드릴 것은 경도에 간 후에 있어서의 기다시라가와교회와의 관계입니다. 경도에 간 후 야마구찌의 호리(堀)선생의 소개로 기다시라가와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예배는 오꾸다(奧田)선생의 댁에서 보았고 일요일의 출석자는 약 25명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칼빈을 연상케하는 선생의 모습과 예리한 설교는 나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같이 지낼수록 선생님의 온화한 인간미가 더욱 더 나에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기다시라가와교회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견신례(堅信禮)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1944년이었습니다. 견신례를 받게 되기까지 나는 대단히 망설였습니다. 그저 신자로서 교회에 다니면 되는 것이지 꼭 견신례를 받아야만 할 것은 없지않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오꾸다 선생님에게 "아직 신앙고백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더니 선생께서는 "이만하면 층분하다고 생각되는 때는 언제까지나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신앙고백을 할 것을 결심하고 견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신앙고백을 할 만한 마음에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는가고 누가 나에게 나는 그 때와 똑같은 상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공조회(共助會)에서의 성서연구와 친교

    나는 호리선생님의 권고에 의하여 경도의 공조회에 들어가 성서연구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성서연구회에서의 주된 텍스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이었습니다. 때로는 성서의 한 절을 가지고 하루밤 내내 걸릴 정도로 자세히 깊이 성성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성서연구회를 통하여 인간의 죄의 심각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지대한 하나님의 은총, 의인(義認), 부활등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기본적인 것을 자세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머리로 이해하는데 불과한 점도 많았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이 모임을 통하여 나의 일생의 신앙생활에 연결된 기본적 신앙고백과 주안에서의 우정이라는 귀중한 선물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공조회 모임에는 오꾸다(奧田)선생, 와다(和田)선생은 물론 경도대학의 교수들, 선배와 재학생이 주요 멤버였습니다. 야마야(山谷省吾)선생도 가끔 참석했습니다. 의학부에서는 이영환(李英環)형과 그리고 오기노(荻野恒一)형이 참석하곤 했습니다. 그 때 받은 나의 인상으로는 상당한 엘리트들의 모임이었다고 느껴졌는데 성서연구를 통해서 깊은 신앙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삼엄한 시국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노골적인 저항을 표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오꾸다선생이나 와다선생의 말씀의 배후에 흐르고 치는 분위기를 보면 기다시라가와교회는 어디까지나 비체제적이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와자끼(澤埼堅造)선생의 동아전도의 계획도 일본이 이웃나라들에 대하여 범하고 있는 잘못을 대상(代償)하고자 하는 의미가 그 속에 깊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와다(奧田)선생은 오꾸다 선생댁과 바로 이웃에 위치한 선생의 댁에서 한국 중학생들을 모아놓고 성서연구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인하(李仁夏)목사도 그 당시 와다선생의 집회에서 성서를 공부하고 있었던 학생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와다선생은 그 당시 참으로 젊은 시절이어서 선생님의 얼굴을 보면 포동포동한 어린 아기의 얼굴 같아서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서의 말씀은 바로 선생과 같이 순진한 마음의 소유자를 가르쳐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1945년 와다선생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만주 전도를 위하여 출발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영환형과 같이 선생을 전송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선생님은 일본에서 보면 멀리 떨어진 만주로 향하시지만 우리들 나라에서 보면 더 가까운 곳으로 가시는 것이므로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하며 선생과 작별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패전 직전의 경도(京都)의 생활

    내가 경도서 지낸 2년간이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의 국면을 맞아 필사적인 국가 총동원을 발동하여 싸우고 있었던 가장 어려운 시국이었습니다. 일본 여러 곳이 B29의 폭격을 받았고 밤 12시경이 되면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려서 방공호로 들어가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다행이 경도는 폭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번은 경도역 부근에 있는 여자전문학교에 비행기의 가솔린 봄베가 떨어져 폭탄이 떨어진 줄 알고 몹시 놀랬던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당시 20세쯤 되었는데 젊은 사람에 있어서 식량난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식권을 가져가야 겨우 하루 2흡 3작이라는 식사를 받아먹고 견디어야 했습니다. 나는 그 때 지엔료(地鹽寮)에 있었는데 거기에 이시까와켄(石川縣)에서 온 의학부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고향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콩을 닦아서 통에 넣어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30등분하여 하루에 30분의 1씩 헤어가며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 정도로 식량난이 지독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지만은 나는 경도에 와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패전 직전까지 일본에서 가장 자유스런 학문적 분위기를 간직했던 경도 대학에서 공부 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일본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힘찬 메세지를 들려준 기다시라가와교회에서 신앙고백을 하여 견신례를 받았고 귀중한 신앙의 기본과 주안에 있어서의 우정을 수여 받음으로서 일본의 가장 좋은 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만일 경도에 오지 않았더라면 일본의 가장 나쁜 면만을 보고 끝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무릇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은 각각 좋은 면과 나쁜 면,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는 바입니다.

    민족 에고이즘과 국가의 팽창주의

    이 같이 한국인과 일본인은 한 사람 한 사람 대할 때에는 참으로 친하게 한 가족같이 사괼 수가 있었고 더욱이 그리스도인 서로 끼리는 주안에서의 우정에 싸여 참으로 한 가족같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는 여러 모양의 참혹한 비인도적인 사건이 그 동안 계속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건설이라는 이름아래 벌려진 그 전쟁이었으며 한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나라의 인민들이 '지원병'의 이름으로 군대로 끌려갔고 군인의 연령이 지난 장년들은 '증용'이 되어 광산이나 전선으로 강제동원 당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로 끌려가 일선으로 보내졌습니다. 한국 '합병'이래 한국민에게 가해진 이로다 말할 수 없는 피박과 굴욕에 대해서는 제가 새삼스럽게 여겨서 말씀드릴 필요도 없을 줄 생각합니다. '공조'잡지에는 제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까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1910년 조선 '합병'당시 일본의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던 에비나(海老名彈正)씨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뒤떨어진 나라가 되어 그 운명을 면할려면은 대국 일본과 병합하여 죽어서 부활하여 대국민으로 태어나기 위해 존재를 잃어버려야 한다. 비극을 통해서 만대국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식민지 정책하의 조선의 실정을 모르고 있었거나 일본의 지배하의 '대 아시아주의'를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으리라고 추측이 됩니다.

    그런데 한편 공조회의 창설자인 모리 아끼라(森明)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개성(個性)을, 그것이 개인이던 민족이던, 무시한다는 것은 죄가 될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하여서는 안될 동화(同化)를 그만 두고 우리들은 인간이 태어난 그대로 어디까지나 성장시켜 나가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森名著作集). 참으로 정당한 내용을 명확히 말씀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팽창주의는 다른 민족의 희생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을 보면서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범죄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개인적인 에고이즘에 대해서는 지극히 예민한데 반하여 민족적 에고이즘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감각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민족이 전쟁을 일으켜 다른 민족을 점령하고 영토를 넓혔을 때 그 전쟁 행위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고 그 잘못된 점을 아무도 비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장군은 그 민족의 영웅으로서 전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도 별로 다른 점이 없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여행을 해보면 어느 나라에서도 관광 명소에는 동상이 서있는데 그것은 대개가 그 나라의 유명한 장군의 동상이며 이웃나라와 싸워서 승리를 얻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가에 대하여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 위에도 민족 에고이즘 때문에 전쟁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 민족 에고이즘을 통하여 악마는 이 지구상에서 새로운 분쟁의 장소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남북분단과 독재 정치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 한국은 일본의 36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전승 강대국들의 무책임한 결정에 의하여 남북 분단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이 초래되었습니다. 한 몸이 두 개로 완전히 절단된 것입니다.

    나의 고향은 북한에 있는데 의과대학 과정을 마치기 위해 나는 서울에 와있었습니다. 그 이후 북한에 있는 가족과는 일체 연락이 끊기고 편지 한 장 쓸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을 줄 생각합니다만은 거기에 남아있는 동생들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50년간이나 이 같이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남북의 분단은 일천만의 이산가족을 만들었을 뿐만아니라 남북 정권에게 독재정치의 구실을 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정한 정치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역대 부정, 부패로 가득찬 독재정권하에서 이 민족은 말로 이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집권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유지에 급급하였고 정부를 비판하는 양심적인 인사,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에 걸어서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군벌, 재벌, 정치가, 언론인들을 결탁하여 정치를 자유자재로 요리해나갔고 그 밑에서 힘 없는 민중들만 처참한 생활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폭악성은 1960년대에서 1970년 초반에 걸쳐서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천만이 넘는 신자를 가지고 있다는 한국의 그리스도교회는 이 불의에 대하여 다만 침묵하고 방관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회가 얼마나 이기적(利己的)인 단체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들어냈습니다. 특히 몇 만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던 대형 교회들, 그리고 소위 교회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목사들은 오히려 독재자에게 아첨하고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구실로 하여 정치적 불의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결국 부정한 정권과 야합하는 역할을 연출하였던 것입니다. 이 종교, 정치의 분리라는 이원론적(二元論的)사고가 교회가 현실에서 도피하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인구의 4분의 1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교인이 제일 많다는 교회도 서울에 있습니다 만은 그 교회에는 몇 십만명의 교인이 있습니다. 그렇게 큰 교회당도 예배하러 온 교인들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없어서 일요일에는 10번에 걸쳐서 나누어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몇 십명의 부목사가 있어서 지역마다 담당을 하고 교인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목회라기보다 어떻게 보면 경영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설교는 이 세상과 내세의 축북의 말만 차있고 그리고 그 내용은 개인적인 문제에 만 국한되어 있고 정부의 부정이나 사회의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그 당시 그렇게도 지독하였던 독재 정치, 군사정치하에서 저질러지고 있었던 부정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 같이 큰 교회에는 장로들 가운데 장관, 장군, 대기업가같은 많은 권력자들이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정치가 아무리 부패해도 그것을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굉장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고 대규모의 성가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매달 상당한 봉급을 받고 있는 음악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에는 다만 마음의 위안과 안심을 주는, 듣기 좋은 설교와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한 주일의 스트레스를 풀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의 교회가 이 같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해서 한국교회는 이렇게 성공을 했는가를 직접 견학하기 위하여 외국에서 많은 목사들이 한국교회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외국사람들이 보면 한국 기독교회의 성장은 굉장한 것이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건전한 교회의 성장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비만증에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자기 민족이 50년간이나 분단의 비극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동안에도 이런 대교회들은 민족 분단에 대하여 과연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요. 많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로니칼하게도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통일이라는 말을 하고 있을런지는 몰라도 '흡수통일'이나 '무력통일' 또는 북한이 자멸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시야가 극히 좁은, 감정적 극단주의가 통일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밀알하나 땅에 떨어져

    누가복음 10:30~34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입니다 만은 여기서 강도에게 습격을 받아 반죽음을 당하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 아닌가하는 것을 요즈음 나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빈사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면서도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그를 피하여 길 저쪽으로 지나갔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같이 고통하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피하여 길 저쪽으로 그대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1970년 겨울, 서울 청계천 지역에 있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全泰壹)이라는 22세 되는 재단공인 한 청년이 자기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들은 일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는 얼마 안되는 자기의 수입을 쪼개서 빵을 사서 다른 가난한 직공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하루에 16시간이라는 중노동에 견디다 못해 병으로 쓰러져 죽어가는 여공들의 모습을 참아 볼 수 없어서 관청이나 여러 사회단체를 찾아다니면서 노동조건을 개선해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교회와도 접촉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받아드려지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경찰의 탄압이 그를 괴롭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태일군은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학대받는 젊은 동료들을 구원해주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회생으로 바쳤던 것입니다.

    그도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만은 이 같이 처참한 동료들을 위해 생명을 끊는 것을 하나님도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몸을 불사른 것입니다. 교회 일각에서는 자살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하여 그를 비판하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과연 '자살'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구조학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낸 '타살'로 보아야 할까요? 어쨌든 전태일군은 지금까지 이같은 처참한 빈사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면서도 못 본체하고 피하여 다른 길로 지나간 기독교회에 큰 층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이 땅의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에게로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존재, 강도의 습격을 받아 반죽음이 되어 있는 인간, 그곳이 바로 우리들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요?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도처에서 강도를 맞나 빈사상태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자로써 존재하고 계십니다.

    혹은 가까운 곳에서 혹은 동족 속에서, 혹은 이웃나라에서 혹은 먼 아프리카의 정글 속에서….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것을 보면서도 못 본체하고 길 저쪽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그리고 귀를 막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제 3세계에서 백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가한 박해는 실로 말로다 할 수 없는 폭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같이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더러 그 박해에 같이 참여 했습니다. 그의 한 예는 199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리고베르타 멘츄의 기록을 보면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나있습니다. '나의 이름은 리고베르타 멘츄'라는 책이 신조사(新潮社)에서 출판되었습니다 만은 그리스도인들은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이 책은 한국에서도 장백 출판사에서 '리고베르타 멘츄'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있음.)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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