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의 암:인간
  • 생명체의 조화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균형(homeostasis)을 유지함으로서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 우리 몸은 겉으로 보기에는 언제나 꼭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나 어느 한 순간에도 꼭 같은 세포로 형성 되어있는 때는 없다. 순간 순간 이 세포가 교체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낡은 세포가 벗겨져 나가면서 한펀으로는 새 세포가 자라나고 있다. 봄이 되면 작년의 날은 가랑잎을 제치고 그 아래서 새싹이 돋아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머리카락, 손톱을 보면 늘 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지금의 머리카락, 손톱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는 작년에 거기에 있던 세포가 아니고 다른 세포로 완전히 바뀌어져 있다. 새로 생기는 세포와 벗겨져 나가는 세포가 잘 균형을 유지할 때 비로써 머리와 손톱은 제 모양을 유지하고 제 기능을 밭휘할 수가 있다.

    적혈구는 골수에서 만들어져 핏속으로 들어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다가 120일이라는 수명을 채우면 비장에 가서 자기의 사명을 마치고 거기서 파괴된다. 골수는 적혈구를 만들어내는 공장이고 비장은 적혈구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골수에서 만들어지는 속도와 비장에서 처리되는 속도가 교묘하게 조화가 되어 우리 몸의 혈액 안에는 언제나 1mm3 당 약 5백만개의 적혈구가 존재하게 된다. 골수에서 적혈구를 만들어내는 속도가 너무 늦거나 파괴는 속도가 너무 빠를 때에는 소위 ‘빈혈’이 되어 심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반대로 적혈구를 만들어 내는 양이 소실되는 양보다 많을 때에는 “적혈구 과다중”이라 하여 이 역시 생명을 위협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알맞게 조정되어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그 생명체가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암세포

    우리 몸에서 암을 일으키는 암세포는 우리 몸의 정상 세포와 아주 비슷하다. 우리 인간이 아직도 암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암세포가 정상세포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암세포를 죽일려고 할 때에는 정상세포까지 죽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같이 암세포와 정상세포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정상세포는 그가 속하고 있는 생명체의 기능에 알맞게 조절을 받고 있으나 암세포는 제멋대로 증식을 한다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암세포는 그 생체를 위해서 공헌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속해있는 생명체에 아무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제멋대로 번식만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논에 벼와 비슷한 돌피가 자라기 시작하면 번식력만 커서 그대로 두면 결국 돌피 밭으로 변해 버리는 것과 같이 우리 몸 안에서 암세포가 제멋대로 번식하여 정상세포를 밀어 제치고 자라서 우 리 몸의 정상세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우리 몸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암세포가 사람의 몸 안에서 제멋대로 번식하여 사람이 죽게 될 때에는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암세포 자신도 결국 함께 죽을 운명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암"이라는 것은 자기가 속하여 있는 모체에는 아무 것도 기여함이 없이 자기 멋대로 번식하여 모체를 점령하여 생명체의 조화를 깨뜨리고 그 생명체를 죽게 하고 자기도 함께 죽어 가는 흉악한 존재이다.

    우리 몸 안에는 수없이 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 수는 아마도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의 수만큼 되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주로 우리 몸의 위장관이나 호흡기 속에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미생물이 기생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체를 죽이지는 않는다. 간혹 우리 몸 안에서 균형을 깨트려 병을 일으키는 수는 있다. 어떤 균들은 오히려 우리 몸 안에서 인간에게 유익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균을 죽이는 항생제를 너무 오래 쓰면 이런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균까지 죽여서 우리 몸에 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같이 인간과 그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 사이에는 서로 죽이는 관계가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러나 암은 이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인간중심의 세계관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이 땅에 군림하여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꽃은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꺾어서 꽃병에 꽃아서 보면 된다. 새들도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지저귀며 노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잡아다 새장에 가두어 놓고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의 세계”에서 보다시피 꽃은 자기 종족을 번식하기 위하여 아름답게 피는 것이고 새들도 자기 종속 유지를 위하여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편리하게 살기 위하여 필요하면 자연을 개척하고 파괴하고 살육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가는 돈을 벌기 위하여 무제한적인 개발을 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이 같이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자기중심적인, 침략적 횡포를 자행하게 되는데 있어서는 서구의 산업발달과 기독교의 창조의 교리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닳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로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26~28)

    여기에 사람에게 “다스리게 한다”, “정복한다”, “부린다” 등의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스리거나 정복한다는 것이 약탈적인 침략이 아니고 “샤롬”적인, 평화로운, 조화로운 다스림이어야 할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다. 자연도 인간과 같은 피조물이다.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이 지구상에서 암적인 존재가 되어 함께 멸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함께 조화를 이루어 공존하며 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한없는 욕망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다. 그러나 지구의 자원에는 한이 있다. 암세포같이 자기가 속하여 있는 생명체는 어찌 되든지 자기의 번식만을 추구할 때 자기가 속한 생명체도 죽고 자기도 함께 죽는 운명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이 땅위에서 언제까지나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장수의 욕망에는 한이 없다. 새로 태어나려는 새 생명에 대해서는 태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거나 죽여버리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유산으로 죽어가는 생명이 일년에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실수를 알게 되면 실로 놀랄만한 숫자인 것은 확실하다. 이같이 수많은 새 생명을 죽여 가면서 자기의 수명은 한없이 연장해 보려는 한없는 욕망에서 유전자 조작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평균 수명은 얼마나 연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20세기 초부터 90년동안에 약 50년이 길어 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길어지면 21세기 말쯤되면 평균 수명이 120세를 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착각이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되어도 큰 일이다. 후진 국가에서 평균 수명이 현저히 길어지는 것은 어린이 때 전염병, 영양부족, 위생상태 및 의료시설의 취약성때문에 죽는 조기 사망이 점차 줄어들기 때문이며 이미 이러한 조기 사망이 없어진 나라를 서는 평균수명의 중가는 점점 둔화되어 증가곡선은 점점 완만해진다. 그래서 시카고대학의 올샨스키(Olshansky) 같은 학자는 인간의 주요 사망원인인 심장병, 암, 당뇨병같은 질병이 극복되더라도 인간의 평균수명은 85세를 많이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한계에 대하여 이론을 제시하고 인간의 수명은 계속 길어져서 100세까지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00세 이상 장수자에 대하여 세밀한 조사가 되어 있는 스웨덴의 최고 장수자는 111세이다. 여러 나라에서의 최고 연령은 대개 110세 정도이다.

    기네스 북(Guineas Book, 1997)에 의하면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프랑스의 쟝 루이즈 칼망이라는 부인으로서 121세 이상 살았다(1875년생).

    미국에서는 2050년이 되면 85세 이상 인구가 1500만 명 이상이 될 것이며 이것은 지금의 5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85세 이상 노년층에서는 그중 3분의 2가 여자이며 대부분이 과부이기 때문에 생활보장이 문제인데다가 여러 가지 노인성 질병에 걸려 그 것을 치료하고 돌보는 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드는 것이다. 스웨덴에서의 연구에 의하면 85세 이상 노인에서는 약 3분의 1이 치매에 걸린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이란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더라도 어느 한계가 있어서 그 이상 더 길어지지도 않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없이 길어진다면 노인인구의 축적으로 이 지구는 포화상태가 될 것이다. 만약 평균 100세까지만 산다고 가정해도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가 생계를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30세가 걸리고 또 정년이 60세라고 하면 정년 후 100세까지 40년간, 모두 합해서 70년 동안의 연령의 인구를 30~60세 사이의 연령층이 먹여 살려야 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 노인층에 있어 만성 질환이 맡아서 막대한 치료비와 간호인력이 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유전자 조작 등 인공적인 조작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수명을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에 알맞는 생활습관(life­style)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두 가지 태도

    근래에 와서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많이 늘었다. 하나의 유행같이 되었다. 독재정권 하에 인권의 억압에 대항하며 투쟁하던 맡은 사람들 이 환경운동으로 방향을 전화하기도하고, 원래 보건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환경분야로 시야를 돌리는 사람들도 맡아졌다.

    이제는 모든 국가에서 산업개발에 앞서서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다.

    환경문제를 생각하는데도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세계가 이대로 나가다가는 자연환경의 파괴로 인하여 인간의 생존조차도 위협을 받게 되었으므로 환경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역시 일차적으로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인간중심의 환경운동이다. 또 하나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서 귀중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므로 그 하나 하나의 생명을 존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모든 생물이 조화를 이루어서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입장에 선 환경운동이다.

    우리는 여기서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1181~1226)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를 생각하게 된다.

    프란시스는 사람을 사랑하였지만 또한 자연 속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모든 것이 다형제요 자매였다. 하늘의 태양을 “형제”라고 불렀고 달이 떠오르면 “자매”라고 불렀다. “귀여운 민들레야! 너는 겸손한 꽃이로구나. 나도 너의 형제란다.” 나무도 형제였다. 매미에게는 “동생 매미야! 하나님의 찬미가를 불러보렴”하고 말하였다. “형제 벌레야! 사람이 다니는 길 위에 있으면 밟힐지도 모르니 더 안전한 곳에 있거라”하며 그 자그마한 벌레를 나무잎사귀 위에 업어 놓고 지나갔다고 한다. 양 한 마리가 팔려 가는 것을 보고 자기 옷을 벗어서 그 양과 바꾸었다. 새들을 무척 좋아했다. 종달새는 프란시스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였다. 새들도 프란시스를 좋아해서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그를 에워쌌다. 모든 피조물을 형제라고 불렀다. 그는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사랑하였다. 들짐승, 벌레, 식물들, 모든 피조물을 사랑했다.

    "주께서 창조하신 만물과 함께
    주여!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프란시스는 죽음까지도 자매라고 불렀다. 그는 죽음이 자기에게 가까이 것을 알고 "그가 오면 즐겨맞으리. 자매되는 죽음이여." 아마도 죽음도 그에게는 자연의 한 부분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슈바이처는 요즈음에 와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철학자요, 신학자요, 의사이다.

    "해가 질 무렵, 배가 바로 하마의 떼를 뚫고 가고 있을 때 '생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라는 말이 내 앞에 떠올랐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다른 모든 살려고 하는 의지에 대해서도 자기 것에 대했을 때와 꼭 같은 생명에 대한 의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이 생명으로써, 다시 말하면 식물이나 동물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신성할 때, 또한 인간이 고생하고 있는 생명을 도우려고 헌신할 때 가능하다."

    "만일 인간이 생명의 신비, 그리고 세계에 가득차 있는 생명과 자신과 신비로운 관계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생명과 자기주위의 모든 생명에 대하여 외경심을 갖게 될 것이다".

    정말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리 원시동물이라 할지라도 헤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면병에 대한 치료약이 나왔을 때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좋으나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세균이 죽어야만 하는데 대하여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라고 쓰여져 있다. 옛날 성서에는 "다스리게"하였다고 되어 있다. 돌보다(abad)의 명사 ebed에는 종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돌보고(care for),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이웃'사랑의 '이웃'안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같은 피조물인 자연까지도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프란시스는 사람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모든 것을 형제자매와 같이 사랑하였다.

    2000. 4. 16 <살림>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Goto Family Home
Copyright ⓒ 2011 Sukchun & Rorobrain. All rights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