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시절 나는 강원도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무의촌 진료를 간 일이 있다. 초등학교 교실을 진찰실로 하고 진료를 하였는데, 그 작은 국민학교 옥상에는 “백만불 수출”이라는 큰 구호가 붙어 있었다. 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백만불만 수출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식의 구호였다. 그리고 그때 뿌린 씨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도덕성 부재의 획일적인 황금만능주의의 열매를 맺어 우리 사회 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속에서 TV, 라디오를 통하여 매일같이 들리는 요란한 소리들이 있다. “일등만이 살아남는다”, “일등만이 기억된다”, “무한경쟁”이라는 구호들이다. 물론 이것이 기업인이나 무역하는 사람들을 위한 구호에 그친다면 상관이 없으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먹고 먹히는 살벌한 생존 경쟁의 마당으로 끌어 들여 일등 아니면 자멸할 수 밖에 없으니 네가 살고 싶으면 남을 잡아먹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무의식 중에 심어준다면 이것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일등 아니면 이 세상에서 아무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100명 중 1등만 살아남고 나머지 99명은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본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99명이 없이 1등이 있을 수 있을까? 1등만 남고 99명이 죽었을 때 1등은 이미 1등이 아니며 그도 역시 자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구호는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한다는 의식을 낳게한다.
100명이 있으면 100명이 다 제각기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 그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1등과 마찬가지로 100등도 중요한 것이다.
남자가 남자로서 존재하는 것은 여자를 죽임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남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의사가 존재하는 것은 환자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며 환자가 없을 때 의사의 존재도 없어진다.
이 땅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보완하며 서로가 조화를 이루면서 비로소 살아있을 수 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가 잔인한 생존 경쟁만이 자기의 살 길이라고 생각하여 남을 멸하는 것을 자기의 본질로 생각할 때 그는 자기가 멸한 자들과 더불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이용해 무한 경쟁을 부축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가기 일등잉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사고는 이 땅을 야만적인 생존 경쟁의 마당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희년청년 2호, 1995.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