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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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홍목사를 알게 된 것은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1986년 김호식목사가 향린교회를 사임하고 경동교회로 가게되어 후임 목회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교인들은 우리가 바라는 교회와 목회자에 대하여 다시 한번 진지하게 논의하게 되었다. 그때 교인들이 바라는 목회자상(牧會者象)으로서는 1) 교인들이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할 수 있는 인격과 성실성을 지닌 분, 2) 검소한 생활자세를 갖춘 분, 3) 기독교의 진수를 전할 수 있는 분, 4)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예언자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 분, 5) 청년들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분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향린 교우들이 이 같은 목회자를 국내외에서 알아보고 있던 중 문동환목사의 추천을 받아 홍목사를 초대해서 설교도 들어보고 여러 면으로 알아본 결과 그 분이 우리가 생각했던 목회자상에 부합되는 교역자라고 판단되어 온 교인들의 찬성을 얻어 홍목사를 초빙하게 되었다.

    홍목사는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한국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모두가 고등고시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법관으로서의 성공의 앞길이 훤하게 보이는 그의 장래를 제쳐놓고 가난하고 힘든 목회자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 때 그의 소망은 '훌륭한' 목자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6년간 농촌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생활을 견디어 내야했다 1974년 37세의 나이로 홍목사는 부인과 세 아이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3년 3개월 동안을 서로 헤어져 살아야 했다.

    미국에서 그는 주로 현대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남미의 해방신학에 접하게 되고 구라파의 정치신학, 역사적 예수, 윤리학 등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같이 신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미 국이라는 나라와 자본주의에 대하여 점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든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를, 루터신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에 귀국하기 전에는 9년간 보스턴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다. 그동안 대외적으로도 북미기독학자회 이사, 한국청년연합의 지도위원, 뉴잉글랜드 목요기도회 창립회장 등 대외적인 활동도 많이 하였다.

    한편 홍목사의 부인 김영목사도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 와서 보스턴대학 신학대 학에서 다시 신학을 공부하여 연합 감리교목사로 안수를 받고 백인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김영목사가 부임하기 전에는 교인도 줄고 부진한 상태에 있었는데 김목사가 맡고 나서는 교 인도 늘고 해서 교회에서도 반기는 상태였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회는 일을 하다가 그만 두어도 일생 생활비가 나오는 좋은 조건이 주어져 있었다. 세 자녀 중 둘은 대학을 나오고 막내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좋은 생활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홍목사는 한국이 자기를 부르면 이제는 고국에 가서 일을 해야지 하는 내적 음성을 듣고 있었으며 그 소리에 순종하여 향린교회의 간곡한 초청에 의하여 고국으로 나오기를 결심하고 13년만에 미국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987년 향린교회 2대 당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부임한지 1년밖에 안 되는 시기에 향린교회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다. 흥목사가 향린교회에 부임한 때는 5공화국 말기여서 엄청난 독재와 억압이 이 사회를 짓누르고 있었다. 홍목사는 귀국하여 이 사회의 구조적인 악 밑에서 시달리고 있는 민중들의 고 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자연히 이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를 파헤치고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예언자적인 설교가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홍목사가 미국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사회적으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 교인들이 그를 초청했던 이유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장로들 중 일부는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설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성경 말씀 중심의 설교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홍목사는 정치와 기독교의 진리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하느님의 정의를 역설하고 이 땅의 부정을 비판하였다.

    홍목사가 향린교회에 부임할 때에는 국적 회복이 아직 안되어 있었으며 그 점에 대해서는 당회원들도 다 알고 있었고 그것이 진행 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국적이 없는 사람은 당회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내세워서 7명의 당회원이 노회에 소원장을 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일부 당회원은 알지도 못했고 하물며 일반 교인들은 전혀 모른 채 진행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우연히 알려지자 온 교인들은 놀라며 분개하며 온 교회가 들끊게 되었다 이에 소원장을 냈던 장로들과 일부 교인들이 하나씩 둘씩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향린교회는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되었으며 홍목사 자신도 내가 과연 이 교회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인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하여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교인들은 전보다 더욱 열심히 단결하여 교회를 섬겼다. 그리하여 홍목사는 소신대로 목회를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한번은 KBS방송국으로부터 생방송인 '심야토론'의 토론자로 초청을 받았다. '민주화 과정에서 이념문제'라는 주제였는데 홍목사는 사양을 하였으나 사회자는 홍목사가 꼭 나와주어야 한다고 하며 이 토론에서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자기네가 보장을 한다는 것이었다. 홍목사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토론 중에 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튀어나왔다. "북한에는 남한에 없는 것이 많아요. 가령, 예를 들면 거지가 없고 실업자가 없고 조직깡패가 없고 '큰'손도 없으며, 창녀도 없고 기생관광도 없고 없는 게 많아요……. 구라파 여러 나라들처럼 공산당을 합법화시켜야 비로소 민주주의사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런 말은 어디에서도 듣지도 못하던 이야기이여서 그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들은 깜짝깜짝 놀랬던 것이다.

    이 심야 토론 사건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켜 홍목사는 사방에서 전화 공세를 받고 '빨갱이 목사', '위험한 목사',' 과격한 목사' 등으로 불려지며 또 한편으로는 유명해져서 여기저기서 초청강연을 하게 되고 제야의 여러 단체의 자문 역을 맡게 되었다.

    심야토론이 있은 후 안기부에서는 그 즉시로 연행하고 싶었으나 방송국에서 한 말도 있고 해서 잡아 가두지 못하고 있다가 그 후 대학을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강연한 내용들을 수집해 가지고 드디어 1991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안기부 수사관들이 홍목사를 구속하였다. 첫 번 재판에서 2년 징역의 언도를 받았으나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반년이 감해져 1년 반동안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 당시 재판이 열릴 때마다 많은 교인들이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는데 홍목사의 당당하고 이론 정연한 진술은 재판관과 재판을 받는 사람이 뒤바뀌어진 것같이 느껴졌다.

    1년 반이라는 감옥생활은 그에게는 은총의 생활이 되었다. 그곳은 좋은 기도처가 되었고 공부와 수양의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홍목사를 감옥에 보내놓고 가슴아팠던 우리교회의 편모를 알아보기 위하여 내가 옥 중에 있는 홍목사에게 보냈던 편지를 써보기로 한다.

    홍목사님!

    교우들에게 보내신 목사님의 편지, 모든 교우들이 감격하여 받아보았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383장 찬송 "환난과 핍박 중에도"와 본회퍼의 옥중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난 절에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실 하느님"이라는 책 표지에 그려진 주님의 몸에 수많은 가시가 뽑히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을 보며 그 가시 하나하나를 뽑아들여야 되겠다고 마음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악법 중의 악법인 이 법에 대하여는 평소에도 많이 들어 왔지만 목사님이 수감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이 악법이 정말로 철폐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칼날, 언제나 펄요하면 휘둘러 목을 자르려고 기다리고 있는 칼날 같은 법, 이것을 그대로 두고저는 통일이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악법을 가지고야 비로소 유지되는 정권이라면 그 것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다고 생각됩니다. 얼마 안있어 이 법은 철폐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굳게 뭉쳐 있습니다. 목사님을 감옥에 가두어 놓으면 교회가 동요하고 나갔던 반대교인들이 쳐들어오리라고 당국은 생각했을지 몰라도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교회란 박해를 가할수록 굳건히 선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전전번 주일에는 안선생이 설교를 했는데 설교 끝에 지금 향린교회를 나가서 따로 모이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경위와 분가선교를 제안하였을 때는 반대하다가 지금와서 교회 분립을 운운하면서 또 하나의 물의를 일키는 것의 부당성을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목사님! 몸 건강하십시오. 불의와 싸우려고 해도 몸이 건강 하셔야 합니다. 식사도 꼬박꼬박 드시고 운동도 적당히 하셔서 건강유지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통일신학에 대한 이론적인 정당성이 널리 알려져야 하겠기에 이에 관한 강연회를 몇 번에 걸쳐져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 강연을 듣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지상으로도 발표하여 통일신학의 신앙적인 양심에 입각한 이론적인 정당성을 이래시키도록 해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수난을 통하여 우리 향린교회의 이 시대의 사명이 뚜렷해진 것 같습니다. 이 구체적 사명을 위하여 우리 교인 모두가 힘을 합하여 매진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다시 쓰겠습니다.

    1991년 3월 26일 홍창의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이든신학교에서는 홍목사가 징역을 하면서도 목회자로서의 품위와 소신을 잃지 않고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긍지를 결연히 나타냈고 용기를 가지고 영웅적으로 투쟁하였으며, 감옥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누가복음을 탐구하였다하여 1993년 졸업식에서 명예 신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그래서 그는 목회학박사, 철학박사, 그리고 명예신학박사 세 가지 박사의 소유자가 되었다.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가려고 비자를 받기 위하여 미국대사관에 갔더니 6개월 이상 징역을 받은 사람에게는 비자를 줄 수 없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홍목사는 영사에게 자기가 양심수이었다는 말을 하면서 '너희 나라는 이상한 나라다. 바로 내가 징역을 살았다는 것 때문에 너희 나라 신학교 총장이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다고 해서 미국을 갈려고 하는데 비자를 안 줄테면 그만 두어라. 내가 안가면 그만이지'라고 했더니 재판 때 기록을 제출하라고 하여 서류를 냈더니 다음날 비자가 나왔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에 가서 신학교 선생들에게 자기가 감옥생활을 하게된 연유를 말했더니 목사가 설교한다거나 글을 쓴 것 때문에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미국 목사들은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홍목사는 향린교회의 목회를 하면서 대내적으로 교회 갱신운동, 대외적으로는 인권운동, 민족통일운동, 친미 사대주의와의 투쟁, 평화 군축 운동,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30여 개에 이르는 사회운동 단체의 공동 대표, 위원장 또는 회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다하였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많은 일들을 해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1993년 향린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 갱신선언을 선포하였고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향린교회에서는 1995년부터 목사 및 장로의 임기제를 도입하였다. 그는 당시에 자신이 65세에 은퇴할 것을 선언하고 교인들이 정년인 70세까지 계실 것을 간청하였으나 향린 50주년 때 퇴임하기로 결정하였다.

    2002년 6월, 온 나라가 월드컵에 정신이 다 쏠려 있을 때(6월13일) 경기도 의정부에서는 신효순, 심미선 14살짜리 두 여중생이 미군 궤도차에 깔려 숨진 사건이 일어났다. 향린교회에서는 매주 일요일마다 명동 거리에 나가서 사진 전시를 하며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며 미국정부에 항의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 22일 열린 미군 재판에서 가해 미군 병사 2명이 무죄판결을 받고 그 두 병사는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온 국민은 불공정한 미군의 처사에 분노하였다.

    홍목사는 2002년 12월 2일부터 1주간에 걸쳐서 여중생 미군 압사사건 범대위 방미투쟁단의 고문으로써 7명의 일행과 같이 미국 뉴욕 및 워싱턴을 방문하여 기자회견을 가지고 UN 및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버려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진상을 폭로하고 부시 대통령의 사과와 소파(SOFA)협정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버렸다. 유달리 추운 날씨에 제대로 겨울 옷도 입 지 못하고 굳게 닫힌 철책문 앞에서 백악관을 향하여 소파 협정 개정을 외쳤다. 그로 인하여 미국 및 국제사회의 여론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연일 수만명이 광화문거리로 나와 촛불을 밝히면서 항의를 하였다. 이 같이 촛불시위가 확산되자 일부 수구세력과 언론들은 이것이 반미감정을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하면서 촛불시위를 자제해야 된다고 떠들기 시작하였다. 홍목사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1976년 북미기독학자대회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한국에 20년간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시노트 신부가 강연을 하는 중에 '세계 여러 지역에 주둔하는 미군은 현지 주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조심조심하는데도 "양키 고 홈"이라는 요구를 받는데 한국에서는 미국이 주둔한지 수십 년이 지나도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해 늘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려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홍목사는 일부 한국인들의 미군 철수 공포증에 대하여 '우리는 한국 정부가 차제에 한 국민은 분명히 미군 철수를 원한다는 것을 미국 당국에 말하기를 바란다. 미군 철수를 두려워하여 반대한다면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원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며 미군의 주둔을 언제가지나 허용하려는 것인가?…….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미국을 배척, 적대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평등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오히려 더 좋은 선린관계를 유지하기위해서 주장한다는 것을 한국 정치인들이나 미국의 정치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이 이번 기회에 불평등한 소파협정을 개정하여 평등한 협정으로 회복시킬 때 비로소 '반미'는 진정할 '친미'로 바뀔 것이다.

    보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교계에서는 그를 '급진적인 통일 운동가', 심지어는 '빨갱이 목사'라고 부르며 향린교회를 '빨갱이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향린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알아보고자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보고 나서는 일반 교회와 다름이 없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홍목사는 이 같이 자기를 '좌익목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독일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20년 동안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당신들이 계속 오른쪽으로만 이동하지 않았는가'라고. 사실 홍목사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데 우리 사회나 기독교계는 수구 보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다. 여기에는 남북분단과 군사적 대치라는 특수 사항을 이용하여 긴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수구세력의 준동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홍목사는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으로서 독일의 본 회퍼, 앗씨지의 성프란씨스, 인도의 간디,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일본의 우찌무라 칸조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을 볼 때 그가 어떤 인생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생의 목표는 성자가 되는 것 이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싸우며 개혁해나가는 적극적인 인간 이 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왔다. 그는 정의감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의를 보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항해 나갔다.

    '비겁은 안전한 지를 묻는다. 편의 주위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가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 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할 때다'라는 실천 운동가의 말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일을 실천할 때 혹시나 실패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적과 동기가 중요하지 그 것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의도로 최선을 다하다가 그것이 실 패로 끝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어여쁘게 보아주시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홍목사는 16년간이나 되는 그의 생의 가장 중요한 토막을 우리 교계의 갱신과 우리 민족의 민주화와 자주, 평화, 통일을 위하여 바쳤다. 16년이라는 세월을 돌이켜 보건대 그는 우리교회가 처음 초청하였을 때 그렸던 바람직한 목회자상에 부합된 목회자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교인들 중에는 그가 좀더 대내적으로 교인들이 외로워할 때 쓰다듬어주고 위로해주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진 교인도 있었겠지만 향린교회 교인들은 대개 의식이 있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보다는 밖을 향해서 나가는 선교에 더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홍목사가 전개한 대외활동이 교회의 선교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선교 그 자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교인들은 오히려 각자가 시간과 용기가 없어서 못하고 있는 것을 목회자가 솔선수범해서 투신하다가 마침내 옥고가지 치른데 대하여 홍목사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매 주일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하며 교인들을 세상으로 보내며 당부하는 홍목사의 말은 향린교회 교인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언제가지나 기억될 것이다. 사실 기독교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속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진리가 그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홍목사 자신이 그렇게 자유인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의 정의감, 민족의 자주 통일에 대한 열정의 밑바닥에는 무엇보다 더 따스한 인간성이 깃들이고 있다. 소탈하고 수식이 없고 다정한 그의 성품은 향린교인들의 추억 속에서 오래도록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평화와 통일의 실천마당-홍근수목사 퇴임기념문집>, 2003, 한울)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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