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 소아과 의국이 세워지고 어엿한 모습을 갖춘지 어언 50년이 세월이 흘렀습니다. 200년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지나간 시절의 소아과 의국의 모습을 뒤돌아보고 다시 새롭게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무척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소아과 의국이 원로 중의 한분이시며 서울대학교 소아과학교실의 명예교수로 계시는 홍창의 선생님을 만나 뵙고, 그동안 우리는 뿌리를 잊고 너무도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이 무색하게 많은 것을 기억하시고, 소아과 의국 그리고 우리나라 소아과에 지극한 애정을 갖고 계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한 여러 동문들과 그 소중한 시간을 나누기 위해 간략하게 나마 선생님과의 대담을 지면에 옮겨 보았습니다.

    안효섭 동문:선생님, 안녕하세요. 바쁘실 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2000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선생님께 지난 시절 우리 소아과의 발자취에 대해 듣고 싶은 것이 많았었는데, 오늘은 정말 귀중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홍창의 선생님: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요즘 더위가 기승을 부려 다들 진료하느라 힘들지요. 내 생각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데 벌써 옛 이야기를 듣자고 하니 참 세월이 빠릅니다.

    김윤경 전공의:선생님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홍창의 선생님:제 고향은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좀 떨어진 곳입니다. 황주는 지금으로 따지면 군청 소재지 정도의 도시였고요. 당시 사과로 유명하던 황주역에 내려 십리쯤 논길을 걸어가면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 나타나는데 그 곳이 영풍리입니다. 초등학교 1년 때까지 황주에 있다가 흥수원(황주서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가는 중간쯤)이라는 곳으로 옮겨 왔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지금의 학제로 보면 중고교라고 할 수 있는 숭실(崇實)중학교에 입학해서 2학년 때까지 다녔는데 민족정신이 강했던 학교였던지라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하여 3학년 때 폐교되고 평양 제 3공립중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1941년 그 학교를 졸업하자 일본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 이과(理科)에 입학했습니다. 다이 3년제이던 과정이 전쟁으로 2년반으로 단축되어 1943년 10월에 경도(京都)제국대학 의학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김도균 전공의:당시 사회에서 의사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어떠하였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히 선생님께서 의과대학을 선택하셨던 이유도 알고 싶고요.

    홍창의 선생님:저의 조부께서는 초년에 대과급제를 하시고 지방에 가서 관직에 있다가 한일합방이 되어 그만두시고, 이후 평양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숭실학교에서 한항을 가르치셨고, 그 후에 고향에서 한의사를 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조부께서 진맥하시고 환자들을 보시는 모습을 매우 인상깊게 보았었습니다. 당시 환자는 그때그때 치료비를 내기보다는 가을에 추수하면 자기 능력이 닿는 대로 찾아와서 농작물로 감사는 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였기때문에 자유업을 선호했었고요. 의사란 직업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과대학을 지원했었습니다.

    이지훈 전공의:선생님께서 일본에서 공부하실 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무슨 불이익같은 것은 없었는지…….

    홍창의 선생님:당시 일본은 독일 의학을 주로 받아들였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발달한 의료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요. 예를 들자면 미생물학 시간에 자기 나라에서 만든 전자 현미경을 이용해서 바이러스를 보여 주기로 했을 정도니까요. 경도대학교는(그 당시 일본의 대학교들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교실마다 독립된 건물을 가지고 있어서 강의실들 사이의 거리가 무척 멀어 때로는 한 교실에서 다른 교실로 가기 위해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강의를 듣기도 했지요. 당시의 경도대학은 일본에서 가장 자유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가진 대학이었어요. 그래서 비교적 많은 한국 학생이 다니고 있었고 교련 시간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또한 외부 기관인의 간섭도 덜 받았습니다.

    김도균 전공의:언제 조국으로 돌아오시게 됐는지요? 45년 광복 당시의 사회 상황이나 의국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홍창의 선생님:제가 있었던 경도는 고적이 많아서인지 다행히 전쟁 때 큰 폭격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폭격을 당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당시 전쟁의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공부를 계속할 수 없어서 1945년 5년 5월 경성제국대학으로 전학을 오게 됐습니다. 전쟁이 점점 치열해져서 한국과 일본된 간의 연락선의 될래가 어려워지고 학비를 보내는 것도 힘들게 되어 학생이 원할 경우에 대학간 전학을 허용해주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할 때에는 의학생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경성제대에서는 그렇지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반강제적으로 군에 들어가기를 강요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전학만 한 상태에서 상황을 주시하면서 학교는 잘 나가지 않았었지요. 그러다가 광복이 되었지요.

    이지훈 전공의:당시 경성제대 의학부 수업도 현재와 같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식으로 강의가 이뤄졌는지요?

    홍창의 선생님:당시도 내과, 외과, 소아과, 산부인과식으로 강의가 이루어졌지요. 광복이 되고 나니, 일본인 교수들은 모두 일본으로 떠나 버리고 주로 강사를 하시던 우리나라 분들이 교수가 되어 강의와 진료를 했었습니다.

    김도균 전공의:선생님께서 소아과를 선택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홍창의 선생님:소아과는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과이지요. 어린아이들을 살려야 하는 소아과는 다른 과와는 달리 무척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소아과는 급성 질환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빨리 대처하지 않으면 사망하게 되고, 내과 등과는 달리 한번 생명을 구하면 평생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므로 내과보다 보람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윤경 전공의: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전공의 제도가 있었나요? 의국원들의 구성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한 년차당 몇 명이 근무하고 계셨는지요?

    홍창의 선생님:당시는 인턴이나 레지던트제도는 없었습니다. 레지던트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수조무원(조교)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조교에는 유급인 사람도 있었고 무급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일정한 수련기간도 없이 자기가 원하거나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공부하다가 강사로 승진하거나, 다른 곳으로 취직을 하거나, 개업을 하는 그런 체계였지요.

    이지훈 전공의:그 당시 전공의들의 당직은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홍창의 선생님:뚜렷이 당직이 있어서 야간에 모든 환자를 보기보다는, 의사마다 자기가 맡은 환자들이 상태가 안 좋으면 집에 가지 않고, 밤늦게 까지 병원에 남아서 환자를 봤지요.

    안효섭 동문:당시에는 어떤 종류의 질환들이 이환율이 높았습니가? 현재와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홍창의 선생님:주로 감염병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지요. 특히나 설사로 많은 생명들이 죽어 갔습니다. 그래서 이국주 선생님 같으신 분은 한 학기 내내 급성 소화불량증에 대해서만 강의하실 정도였지요.

    김윤경 전공의:급성소화불량증(설사)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주십시오. 당시에는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요? 그리고 그밖에 이환율이 높은 질병은 무엇이 있었나요?

    홍창의 선생님:당시에는 전해질의 소실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Electrolyte 검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였으니까요. Electrolyte photometry가 60년대에나 가능했어요. 당시 제 석사 논문이 설사환자에 대한 potassium요법에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설사 환자들은 심한 탈수상태가 되어서 많이 입원했었고, 쇼크상태에서 피를 주고 싶어도 혈액은행도 없는 상황이라 제대로 주지 못해 때로는 자기의 피를 뽑아서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신생아 파상풍도 무척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의료 수준도 문제였지만 환자의 의료비도 없어 큰 문제였습니다 신생아 파상풍은 치료해서 살기만 하면 후유증없이 완전히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보호자가 산 사람이 먼저라고 하면서 데려가버리기도 했습니다.

    김도균 전공의:먹고 살기도 힘들 때 아기가 아프면 보호자들은 무척 난감했을 것 같아요. 요즘 같으면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들인데……. 보호자들하고 의사들하고 부딪히는 일들은 없었는지요.

    홍창의 선생님:그 땐 치료비가 없는 것이 큰 문제였지 의사와 대립하는 것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의사를 신뢰하고 말을 잘 듣는 편이었지요.

    이지훈 전공의:아까 수혈애기를 해주셨는데요. 당시 수혈은 어떻게 해 주셨나요?

    홍창의 선생님:당시에는 혈액은행도 없었고 마음대로 혈액도 주지 못했어요. 대부분 아이들이 shock일 때에나 그때 그때 뽑아 주었지요. 당시에는 자기 아이가 아파도 부모들이 자신의 피를 주려고 하지 않았지요. 할 수 없이 제 피를 뽑아서 준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내 피로 수혈한 환자가 shock에서 회복되고 기운을 차릴 때 무척 보람을 느꼈습니다.

    김도균 전공의:그밖에 다른 질환은 없었나요? 결핵도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했을 것 같은데…….

    홍창의 선생님:결핵성 뇌막염은 정말 흔한 질병이었지요. 특히 봄에 많았는데, 그 당시에는 결핵성 뇌막염이라면 100%죽는 병이었습니다. 진단이 결핵성 뇌막염이라고 붙였는데 혹시 환자가 살아나면 진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까요. 미군이나 안식교병원을 통해서 Streptomycin이 들어 오면서 그나마 조금씩 환자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그밖에도 Diphtheria로도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구요.

    김윤경 전공의:당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하는 소아과 환자 수는 얼마 정도였나요? 한 의국원이 몇 명의 환자를 담당하였는지 궁금합니다.

    홍창의 선생님:한 의사당 5~6명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입원 환자는 약 30~40명 정도였고요.

    이지훈 전공의:교수님들은 어떤 분들이 계셨나요?

    홍창의 선생님:당시 소아과에는 일제시대에 교직에 계셨던 이국주 선생님, 이선근 선생님, 이동기 선생님, 그리고 월북하신 이병남 선생님 등이 계셨습니다. 실험도구나 기구 등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환자 보는 일 외에는 연구 등의 일은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김도균 전공의:소아과 병동의 구조는 지금하고 많이 차이가 있었겠지요?

    홍창의 선생님:소아과는 병원 제일 끝 병동의 2층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중앙검사실이라는 것이 없고 각 과마다 검사실이 병동에 붙어있어 모든 검사를 각 환자의 담당 의사가 모두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시행하지 않고 남이 시행한 검사는 믿지 못하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이러니 신환이 오면 다음날 회진 돌기 전까지 모든 검사들을 다 시행해서 회진 시간에 보고해야 하였기 때문에 의국원들은 검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Short term memory에 괴로워하는 젊은 우리들이 무안할 정도로 선생님은 참으로 많은 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때 맞추어 나온 맛있는 중국 요리를 먹으며, 무더운 날씨에 더욱 시원하게 혀끝에 닫는 맥주도 마시며, 우린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안효섭 동문:선생님, 6.25전쟁 때 얘기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6.25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학교와 사회의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요?

    홍창의 선생님:광복 이후 45년부터 50년까지는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京城醫專)과의 통합문제로 학교가 불안정한 모습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불안하였지요. 당시 소아과에 들어왔던 저의 동기 4명 중 3명은 이북으로 가고, 결국 저만 소아과 의국에 남게 되었지요.

    김도균 전공의:6.25 한국 전쟁 당시에 의국원들은 전부 흩어진 상태였나요, 아니면 다른 곳에 모여서 진료나 병원 업무를 할 수 있었는지요?

    홍창의 선생님:남쪽으로 피난간 이후 서울대병원은 제주 한림에 구호병원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후에 부산으로 옮겨서 병원을 운영했는데 저는 한림에 2명이 남아 있게 되어 부산으로 가지 않고 계속 한림구호병원에 남아 있다가 서울로 직접 돌아 왔지요. 당시 돌아와서 본 서울대병원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있었지요.(전쟁 중에는 병원 건물을 미공군이 쓰고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뒤떨어져 있던 우리의 의료 수준이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이국주 신생님과 저, 그리고 문형로 선생, 강원자 선생 4명이 예전의 교수 관사(현재의 암센타 건립 장소)자리에 임시 외래를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병원 수리가 되어서야 입원 환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6.25 한국전쟁 얘기가 나오자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미처 적지 못한 피난 중에 있었던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다. 특히 피난길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발을 동동 구르던 중, 학원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뚝섬에서 보트로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말씀에서는 선생님의 두툼하신 인품을 엿볼 수 있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그저 마냥 신기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였을 뿐…….

    안효섭 동문:이 전에 소아과 교과서로는 어떤 책을 사용했나요? 지금 사용하고 있는 Nelson같은 책이 있었는지요?

    홍창의 선생님:일제 때는 일본말로 된 작은 교과서가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대부분 교수가 강의하는 강의 내용을 적은 강의노트가 전부라고 할 수 있었지요. Slobody가 쓴 소아과 책을 사용한 대학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강의노트가 전부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글로 된 소아과 교과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문교부에서 번역도서 출판을 원조해 주는 계획이 있어서. Nelson 교과서의 번역을 신청했더니, 그것은 너무 page가 많다고 하여 Slobody의 책을 번역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항목을 추가하고 그림도 넣고 해서 그런 대로 제대로 된 책이 나온 셈이었지요.

    김윤경 전공의:소아과 교과서 말씀이 나와서요, 궁금해서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여러 권의 저서와 교과서를 저술하셨는데,「소아과 진료」라는 책은 어떤 취지로 만들어진 책인가요?

    홍창의 선생님:처음에 번역해서 냈던 교과서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개원의를 위해서 진료시 참고한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소아과 진료」라는 책을 내게 됐지요. 주로 임상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각 진병의 증상을 정리하고 bedside에서 시행하는 수기(手技)와 간단한 검사수치 및 치료법 등을 정리한 책이었습니다.

    안효섭 동문:저희 학생 때나 인턴 때 선생님의 쓰신「소아과 진료」를 보면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특히 무의촌 진료나갈 때는 거의 필수적인 책이었지요.

    홍창의 선생님:사실은 6.25사변 이전에 임상 검사 수기에 대한 간단한 책을 쓴 일이 있었지요. 그 당시는 담당 의사가 직접 모든 검사를 해야 되었기 때문에 혈액검사 등 여러 가지 검사법을 그림과 함께 간단히 설명해서 만든 책인데, 당시 최한웅 선생님이 동명사라는 출판사에 얘기해서 조판까지 들어갔었습니다. 책을 내기 일보 직전에 6.25가 발발해서 장독 안에 원고를 넣고 땅속에 파묻어 두고 피난을 갔었지요.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원본은 그대로 있었지만 책을 조판해 놓은 인쇄소가 완전히 부서져 버려 책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이지훈 전공의:50년대 후반에는 외국 대학과 교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홍창의 선생님:해방 후 어느 정도 현상 유지가 되어 가던 병원이 6.25전쟁으로 이젠 일상 진료에 필요한 것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미네소타 대학과의 서울대와 교환교수프로그램이 생겨서, 1955년부터 실행이 됐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1955년 9월 미네소타에 가게 됐지요. 저는 혈액 분야에 관심이 있어, 1년 동안은 그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실험도 했습니다. 1년 동안 혈액 특수 검사실에서 혈액과 골수 슬라이드를 보면서 공부하였는데 어느 정도 자신도 생기고, 처음엔 많은 것을 선배교수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나중에는 제가 잘 모르는 것은 그들도 잘 모르더라구요.(웃음) 그런데 그 당시 미네소타 대학에는 Lillihei라는 유명한 심장외과 교수가 있었는데 이 분이 성공적인 개심수술을 처음으로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환자들이 몰려와서 수술을 받기 시작하는데 심장 수술로 청색증 환자가 정상으로 되는 것을 보면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모국에서 정말 필요한 분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후반기 1년 간에는 소아 심장과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미네소타에서는 심도자실만 해도 4개가 있었고, 수술 환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제가 귀국해서 1958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심도자술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흉부외과의 이영균 선생님과 마취과의 이동식 선생님도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수를 받고 귀국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흉부외과 교수가 교환 교수로 나와 있었습니다. 이 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심수술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김윤경 전공의:그 때 수술 받았던 환자는 어떤 환자였습니까?

    홍창의 선생님:심실중격결손증 환자였는데 수술 받은 지 6시간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이 환자는 제주도 피난 시절에 알게 되어 친분이 있던 사람의 아들로, 첫 수술례가 사망하니 낙심도 많이 되고 의욕도 많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수술받겠다는 환자 수도 줄었고, 수년 동안 공백이 있었지요. 이 후 15년 간 선천성 심장 환자로 진단받은 례가 약 1000례 정도 있었는데 실제 수술을 받은 환자는 약 100례 밖에 안되었습니다.

    이지훈 전공의:그 때 공부하신 혈액분야에 대해서는 진료하진 않으셨나요?

    홍창의 선생님:심장 부문이 지지부진하니까 자연히 관심은 혈액분야도 쏠리더군요. 처음으로 항암치료를 시행해서 급성 백혈병 환자를 살리기도 했고……. 그 환자들이 지금은 40세 정도 됐을 겁니다. 그 당시 환자의 부모들이 지금도 일년에 한번씩 집을 찾아오지요. 그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라서 재생불량성빈혈환자가 많았고요. 시간이 지나 점차 심장환자가 늘어나면서 혈액종양분야는 전부 안효섭 선생에게 넘겼지요. 이렇듯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선생님 이야기를 정신없이 듣고 있던 중, 밖에서는 영업을 마치고 청소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이야기를 정리해야 하는 아쉬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효섭 동문:선생님, 듣고 싶은 말씀은 많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마지막으로 소아과 의국이나 후배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당부의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창의 선생님:당부할 것이야 많지만, 첫째로 정도(正道)를 가는 의사가 되기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현재 보험제도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어떤 소아과 의사들은 기본 생활조차 어려울 정도로 경제 상태가 나빠졌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소아과 의사들도 상황이 차차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교과서에 써 있는 대로' 올바르게 그리고 성심껏 환자를 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교과서대로 환자를 본다는 것은 의사의 당연지사이긴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개업을 하더라도 교실에서 배운 대로 환자를 진료하도록 당부하고 싶습니다.

    둘째로 흔한 병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소아과 전문의 교육 목표는 유능하고 양심적인 개원의를 만드는 것입니다. 유능하다는 것은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아과 의국에서 배우는 동안, 대부분의 전공의들이 대학병원에서 보는 특수한 병에만 관심을 가지고 흔한 질병들을 소홀히 하기 쉬운데 오히려 개업을 하는 경우에는 환자들의 병들이 이전에 소홀히 했던 흔한 짙병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중이염이나 부비동염 같은 흔한 질병에 대해서 정확히 진찰하고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둔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새로운 지식들을 받아들이는데 부지런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전문의 시험이 끝나면 아예 책에서 손을 놓고 공부와 멀어지는 의사들이 있는데, 항상 새로운 지식에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자신의 진료에 응용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컴퓨터를 통하여 많은 유용한 지식들을 쉽게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서울대 소아과 의국이 이런 새로운 지식이나 치료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직 소아과 자체의 인터넷 홈페이지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upgrade하고 의국을 거쳐나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 지식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잘 구성된 소아과 교실 자체의 인터넷 홈페이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넷째로 소아과 의국을 마친 사람들과 소아과 의국과의 교류가 잘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원을 한 사람이 진단이나 치료가 어려운 환자를 손쉽게 의뢰할 수 있고 또 대학병원은 그 결과를 곧바로 feedback해서 환자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높일 수 있는 그런 조직이 만들어 져야 합니다. 지금도 동문환자 의뢰제도가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제도를 잘 운영해서 빠른 feedback을 통해 동문들의 실력도 높이고 좋은 유대 관계를 쌓는 일은 무척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외국처럼 한국에서도 소아과 환자가 줄어들 것이고 각 병원마다 환자를 모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환자의뢰제도가 잘 활성화되면 환자가 계속 병원을 찾게 될 것이고 개업하고 있는 동문들도 자신의 의학적인 지식이나 진료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안효섭 동문: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약 3시간에 걸친 마라톤(?) 좌담비었다. 어느덧 선생님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었다.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노선생님의 피로함을 무릅쓰는 실례라할지라도 더 많은 말씀을 부탁드렸을 지도 몰랐다. 저녁 늦게 찾아 뵌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까…….

    50년대, 그렇게 힘든 시절을 소아과에 대한 애정만으로 꿋꿋하게 살아오신 선생님의 인품의 향기로 인해, 피곤으로 지쳐서 병원으로 남은 일을 처리하러 돌아오는 발걸음이 오히려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성실하지 못했던 그 동안의 의국 생활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랐고 선생님을 돌아보면 오히려 죄송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의 귀감이 바로 지척에 있었는데, 이제라도 선생님께서 몸소 일구어 내신 소아과에 더욱 애정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기회에 또 선생님을 뵙고 더 큰 이야기 상자를 열 수 있는 기회 가 있었으면 한다. 끝으로 여기 이 지면을 빌어 선생님께서 동문들에게 이렇듯 생생한 역사를 일깨워 주시고 소아과 의국이 나아갈 바를 말씀해 주신데 대하여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선생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1999년 8월, 서울의대 소아과 동문회지 13호)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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