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 창립 동지들의 만남과 교회를 창립하기까지

    향린교회를 창립한 동지들은 이런 저런 인연으로 오래 전부터 서로 알고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었다. 이영환, 곽상수, 홍창의, 한철하는 일제시대, 일본 야마구찌(山口)고등학교(구제)에 다닐 때 선후배였으며, 영어 선생(호리 선생) 댁에서 토요일 저녁마다 모이는 성서연구회에도 같이 나갔다. 또 이영환과 홍창의는 교토(京都)대학 의학부를 같이 다녔고, 그때 공조회(共助會)라는 신앙모임에도 함께 나갔다.

    해방 후 일본서 대학을 다니던 학생들이 서울대학교에 편입이 된 후,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가 결성되면서 안병무, 장하구, 이종완, 이영환, 곽상수, 홍창의, 한철하 등이 만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기독학생회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대학 밖에서도 우정을 맺고 신앙 활동을 하였고, 졸업 후에도 모임을 가졌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가까이 지낸 동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 모임을 ‘일신회(一信會)’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뜻은 한 하느님(一神), 한 믿음(一信), 한 몸(一身)을 의미하였다. 이 일신회원들 중에는 곽상수, 김동명, 김철현, 백종무, 안병무, 오기형, 이영환, 이종완, 장하구, 한철하, 홍창의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전공은 각각 달랐으나 함께 모여 기도회, 성서연구, 독서회, 신앙토론 등을 하였다. 이 모임은 진지하여, 모이는 시간도 엄수하였고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독서회도 가졌는데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같은 신학자들의 책을 읽었다. 그 때는 복사기 같은 것이 없어서, 먹지로 일일이 써서 나누어서 보았다. 모이는 장소는 집을 돌아가면서 모였는데 돈암동에 있던 곽상수 집, 안암동에 있던 한철하 집 등이 기억난다. 또한 장하구, 이종환, 이영환, 홍창의, 한철하는 신설동에 있는 신암교회의 같은 교인이었다. 이와 같이 이들은 학교나 교회를 통하여 오래 전부터 서로 신앙의 친구로서 지낸 사이었다.

    1950년 6월 23일, 안병무, 이영환, 장하구, 이종완, 홍창의, 한철하는 자하문 밖 승가사 근처에 있는 기도원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그런데 사흘째인 25일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수련회를 중단하고 산을 내려와 아무런 기약 없이 서로 헤어졌다.

    그 들은 각처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 피난 생활 중에도 안병무가 흩어진 친구들을 서로 연락하며 교류하는데 수고하였다. 신앙동지들의 글을 모아 ‘야성(野聲)’이라는 신앙지를 발간 한 것도 이 시절이었다.

    나는 피난시절, 제주도 한림에 설치된 서울대학교병원 구호병원에서 피난민들과 제주도민들을 치료해주고 있었다. 그 당시 한림은 제주도에서 제주 다음으로 큰 마을이었으며, 그곳에 한림교회가 있어서 나는 주일이면 이 교회에 나갔다. 마침 서울서 한림으로 피난 온 고아원 보모가 오르간 반주를 할 수 있어서, 그 교회 젊은이들과 간호사들을 모아서 성가대를 조직하여, 내가 명목상 성가대장이 되어. 직접 악보를 등사판에 밀어서 나누어 주며 찬양순서를 맡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번은 안병무 형이 나를 만나보기 위하여 멀리 부산서 제주까지 배를 타고 제주에 와서 또 한림까지 버스를 타고 찾아왔다. 그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여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이 기회에 나는 안 형에게 부탁하여 한림교회에서 며칠 동안 신앙 강연회(부흥회)를 가졌는데 대 성항을 이루었다.

    이영환이 전주 적십자병원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전주가 피난 중에 동지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1952년 10월에 전주에서 일주일 동안 동지들이 모여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하고 기도한 결과 서울로 돌아가서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시작할 것을 결의하였다.

    6. 25 전쟁이 아직 끝나기 전, 멀리 북쪽 하늘에서는 아직 포성이 들려오든 1953년 초반, 남산 북쪽 기슬에 있는 ‘향린원’이라는 고아원 안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을 수리하고, 6명의 신앙동지들이 피난지로부터 한 가족씩 서울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5월 17일에 향린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교회 창립 동기와 창립 정신

    민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으며, 아무 희망도 주지 못하는 교회를 바라보며,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목회자가 설교로만 하는 교회, 주일에 한번 설교나 들고 가서는 일반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살다가 그저 나오는 교인들, 전쟁 중에도 교파싸움으로 실망만 주는 교회지도자들.

    물론 교회도 부족한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지만, 교회가 이럴 수만은 없지 않을까? 참 모습을 한 교회가 어디엔가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를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 함께 모여 참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고, 직업적인 목사가 아닌 평신도로써, 각자가 가진 직업을 통하여 입체적(유기적)으로 섬기며, 교파 싸움이나 규제에 억매이지 않도록 독립교회로 시작할 것을 결단하게 되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하나를 더 보태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작지만 이 시대, 이 땅에 있어야만 할 교회의 모델을 생각하였다.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2013년이 되면 향린교회가 창립 60주년을 마지하게 된다. 창립 당시 생각했던 (1) 공동체적 교회, (2) 평신도 교회, (3) 입체적(유기적) 교회, (4) 독립교회 등의 창립정신은 외형적으로 문자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처음에 생각하였던 내용 중에서 비현실적이었던 점들을 제외한다면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교회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정신 자체는 올바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그것이 실천되지 못하였으며, 그것이 오늘 날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1. ‘공동체적’ 교회

    교회는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의 삶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당연히 공동체이여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공동체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동지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그러한 ‘공동체적’ 교회를 이루어 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꿈을 실천해보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로 오랫동안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이 있었고, 둘째로는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되는 때였고, 셋째로는 마침 향린고아원 자리에 넓은 공간과, 전쟁으로 다 폐허가 되었지만 우선 판자로 칸막이를 하고, 신문지로 도배를 하고 함께 들어가 살 수 있는 건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 당시, 여섯 사람 중에서 다섯은 이미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안병무만 아직 독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침에는 작은 도서실에 모여 기도회를 가짐으로서 하루를 시작했고, 매 주 당번이 있어서 한 가지씩 실천사항을 정하였고 일기를 쓰기도 하였다. 주일에는 온 가족들이 낡은 한옥 예배실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중앙에 있는 종각에서 들리는 종(거꾸로 매달은 산소통) 소리는 신선한 남산 공기를 타고 은은히 울려 퍼졌다. 피난에서 돌아온 생활이라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초창기의 향린원 안에서 함께 살았던 그 시절이 일생 동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시간이 지나고 현실에 부딪치면서 서로 간에 차이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일반 생활양식을 지양하고 반(半)수도원적인 생활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다만 한 울타리 안에 함께 살면서 한 교회의 모델을 이루어 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초대교회와 같이 서로 유무상통하는 생활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각자 가정생활을 하면서 능력대로 공동체에 바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동지들끼리만 모여서 산다면 반수도원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었겠으나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그러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비현실적이었다. 우정과 열정에 의존하여 사회체제에 대한 고려가 불충분하지 않았었나 하고도 생각된다.

    원래 창립자들은 일반 교회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고, 함께 모여 살면서 하나의 작은 공동체적 교회를 생각하였지만, 밖에서 찾아오는 교인들이 늘면서 교회로 쓰고 있던 한옥 건물이 너무 협소하고 낡아서 새 교회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향린원을 불하받는 것만으로도 재정적으로 어려웠는데, 새 교회 건물까지 건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향린원을 매각하고 남창동에 새 교회를 짓고 옮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린원 안에 함께 살던 창립자들도 집을 구해서 나가게 됨으로서, 한 울타리에 함께 살면서 생활 공동체적 교회를 이루려고 했던 생각은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 인간들은 공동체적 삶을 갈망하고 있으며 여러 모양으로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삶의 양식으로써의 공동체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교회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2009년도 향린교회의 전교인 수련회에서도 공동체에 대한 문제가 다뤄 졌다. 우리 교회는 분가선교를 지향하고 있다.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함께 살고자 하는 진지한 교인들이 있으면 분가선교의 한 형태로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 평신도 교회

    평신도 교회’라고 하면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직업적인 목사를 모시지 않는 교회를 의미하고 또 하나는 목사는 모시되 평신도가 주체가 되는 교회를 의미한다. 후자는 ‘평신도적’ 교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향린교회는 처음 직업적인 목사가 없는 평신도 교회로 출발하였다. 창립자들이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하면서 함께 힘을 합하여 목회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교인의 수가 늘면서 전담 목회자가 없이 교회를 돌보는 데 역부족하여, 창립 후 21년 만에 전담 목사를 모시는 일반 교회로 전환하게 되었다.

    1대 김호식 목사가 취임하면서 부교역자, 여전도사도 모시게 되었다. 그 때부터 향린교회는 일반교회로 성장하게 되어 교인 수도 증가하여 3부 예배까지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교회를 매각하고, 강남에 대지를 구하여 새 교회를 짓고 나가자는 대교회주의적 생각을 하는 교인들도 생겼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병폐인 대교회주의로 나갈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분가선교를 할 것을 주장하는 교인들이 여전히 있었다. 2대 홍근수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의 민주화와 교회 밖을 향한 사회참여를 통하여 교인들의 평신도로써의 선교적 역할을 넓혀갔다. 3대 조헌정 목사에 이르러서도 향린교회는 교회 밖을 향한 사회참여를 계속하면서 평신도 설교, 평신도 축도, 소 모임 등을 도입하여 목회의 평신도화를 넓혀나갔다.

    이와 같이 향린교회는 21년간 전담 목회자가 없는 평신도교회이었다가 그 이후로는 전담 목사를 모시면서도 평신도가 목회의 주체가 되는 평신도적 교회로 발전하여 왔다. 이제 평신도들은 앉아서 설교만 들고 가는 관중이 아니라, 교회를 실제로 움직이는 주체가 되는 평신도적 교회로 되어 왔다.

    3. 입체적(유기적) 교회

    입체적(유기적) 교회라는 것은 교회가 세상(교회 안과 밖을 다 포함)을 향해서 나갈 때, 목회자의 설교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 각자가 가진 모든 것 (직업, 능력, 시간)을 동원하여 입체적(유기적)으로 선교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평신도들이 자기의 직업(교육, 철학, 의료, 음악, 미술, 경제 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목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향린교회가 초기에 의료인들이 의료봉사대를 조직하여 매주 예배 후에 거여리에 있는 거암교회에 의료봉사를 나아감으로써, 그 교회에 파송했던 전도사와 더불어 입체적인 선교를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입체적 교회’라는 정신은 ‘공동체적 교회’, ‘평신도 교회’, ‘독립교회’와 같은 창립정신들이 처음 생각했던 형태로 실현되지 못하였을 동안에도 계속 실천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이러한 입체적 선교는 사회가 발전하는 데 따라, 분야별로 작은 공동체들을 형성함으로써 더 효과적인 선교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현재 향린교회 안에는 분야별로 여러 가지 소 모임들이 형성되어 있어서 각 분야별로 교회 내외적으로 목회활동에 이바지하고 있다. 향린교회는 많은 탤런트를 받은 교회다. 이 탤런트를 사장하지 말고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향린교회는 작지만 큰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독립교회

    향린교회는 처음에 일반 교회와는 달리 공동체적 교회, 평신도 교회로 시작했기 때문에, 일반 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교회로 시작하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 한국 교계는 교파싸움이 심하여 교인들에게 실망만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타적이나 독선적이기 때문이 아니었고 무교회주의도 아니었다.

    그러나 교파싸움이 점차 수그러지고, 반면에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불편한 문제들이 생기면서, 차라리 어떤 교단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느 교파로 들어갈 것인가, 그대로 독립교회로 남아 있을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교인들 사이에 이견이 많았고, 창립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그래서 공동의회에서 결정하기로 하여 표결한 결과 교단에 가입하자는 교인이 많아서, 결국 독립교회로 출발한지 6년 만에 교단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어떤 교파로 들어 갈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는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적이고, 에큐메니칼하다고 생각되었던 한국기독교장노회(基長)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창립한지 얼마 안 되어서 독립교회를 포기하게 된 데는, 이상과 같은 이유 이외에도 창립자들 간에 공동체에 대한 견해에 차이가 있었고, 또한 향린교회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이 적은 일반 교인들이 늘었다는 데도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장 교단으로 가입한 후에도 향린교회는 단임 목사를 모시지 않는 평신도교회로 그대로 남아 있다가 창립한지 21년만(1974년)에 비로소 목사를 모시는 일반교회로 되었다.

    향린교회가 한국기독교장노회에 들어갔지만 향린의 특수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회 자체의 규정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교회 40주년에는 교회갱신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민족 정서를 담아내는 예배, 교회의 민주화(목회위원회, 목사 및 장로의 임기제, 남녀 차별의 철폐 등), 선교 지향적 교회로의 갱신 등이 포함되어 있다. 2005년에는 향린교회의 운영과 활동에 관한 정관을 제정하였다.

    이와 같이 향린교회는 처음에 독립교회로 시작하였다가 기장으로 가입은 하였으나 향린에게 주어진 특수한 사명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항상 미래 지향적으로 자신을 개혁해 나갔다.

    5. 밖을 향한 교회

    위에서 언급한 4가지 항목 중의 하나는 아니지만 우리 향린교회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저류가 있다. 그것은 향린교회는 ‘밖을 향한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향린교회가 평신도교회, 입체적인 교회를 지향해 왔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교회는 자신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교회 밖(세계)을 향한 공동체이다. 교회는 타자(他者)를 위한 공동체 일 때 비로소 교회로서의 존재의 의미가 있다. 교회 안에서의 교인들 간의 친교도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가 교인들 끼리만의 즐기는 폐쇄된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회안의 소 모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향린교회는 처음 평신도교회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교회 자체를 위한 예산이 적게 들었고, 그 대신 그것을 밖을 위하여 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창립 3년 만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였고, 초창기에는 헌금의 80% 까지도 교회 밖을 위해 쓸 수 있었다. 교회 자체를 위한 경비는 최소화 하고 대외 선교비는 극대화 하도록 하였으며, 전임 교역자를 제외하고서는 봉사를 원칙으로 생각하였다. 보통 교회에서는 여름에 에어컨을 쓰고 있던 시절에도 오래도록 에어컨 없이 지냈다. 어떤 교인이 에어컨을 헌물 하겠다고 하여도 그것을 사양하고 그대로 에어컨 없이 더운 여름을 지내기도 하였다.

    민족상잔의 6.25전쟁 중에 태어난 향린교회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여 앞장 서 왔다. 또한 향린 교회는 민족교회로써 민중과 고통을 함께하며, 사회의 정의구현에 앞장서며, 불의한 권력과는 싸우며,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는데 노력해왔다. 이것이 또한 향린이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글을 맺으며

    향린의 창립정신을 외형적으로만 보면 다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그 안에 담겨있는 정신은 오늘 날에도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나 방법의 부적당함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있다면 앞으로 향린의 역사 속에서 더 적절한 모습으로 구현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같은 정신도 시대와 형편에 따라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나 제도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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