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라는 라는 것은 어떤 공동의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 공동의 뜻을 우리는 그 공동체의 정체성이라고 불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교회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모임일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그가 가실, 그 길을 따라가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일 것이다.
교회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취미나 소원을 살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기관은 아니다. 교회에 처음에 나오게 된 동기는 어떠했든 간에, 결국에는 예수님의 삶을 보고, 결국에는 앞서 간 그의 길을 따라가 보려고 애쓰며, 그것을 위해 서로 힘을 합쳐서 살아보려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지금 계신다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실지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하시면서,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시선을 향하며, 그들을 자기와 동일화 하였다. 그들 속에서 우리는 예수를 만나게 되고, 그 들과 함께 예수 공동체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 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물질, 재능, 지식, 취미, 시간 등)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가장 고통 받고,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며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회퍼가 말 한대로 교회는 타자(他者)를 위해서 존재할 때만 교회일 수 있다. 그 ‘타자’라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 찾아 가셨던 그 곳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교회 안에서의 서로의 친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친교가 자기들만의 친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교를 가지고 밖을 향하여 나아 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교회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밀알 하나하나의 희생이 필요하다. 희생 없는 곳에 열매가 맺을 수 없다. 교회가 각자의 처지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저 재미있게 지내는 친목단체에 머물어있을 수는 없다.
“주님은 이 세상 끝날 때 까지 고통을 당하시나니 우리는 그동안 졸아 서는 안 될 것이다” (파스칼)
향린 60년, 이 세월은 나에게는 나의 일생이나 마찬가지다. 내 나이 30세에 이 교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지금까지 향린과 같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한 일이란 별로 없다. 봄이 되면 새 잎사귀가 나오고, 가을이 되면 노란 낙엽이 떨어지는, 교회 앞마당의 서있는 저 은행나무처럼, 그저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면서 옆에 서있었을 뿐이었다. 교회를 같이 시작했던 동지들은 다 가버리고 아무도 없다. 쓸쓸함에 잠길 때도 많지만, 젊은 교우들을 바라보며, 씩씩한 향린의 앞날을 희망해본다. 이제는 백발이 무성하고, 기력도 쇠하였으니, 때가 오면 낙엽 되어 흙에 묻혀 한 줌의 거름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2011.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