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이 계시는 곳
  •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오 25: 35-40)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0: 25-37)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과 함께 현존하신다.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즉 이 세상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 받는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현존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이나, 한 공동체나, 교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험한 길가에서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거의 목숨이 끊어져 가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항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상항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1) 못 본체 하고 지나가는 것 (회피)
    2) 그에게로 다가가는 것

    회피

    사제와 레위 사람은 이를 피해갔습니다. 이 들은 그 당시에 종교계의 대표자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자, 목사, 사제, 교역자, 교회 지도자들, 넓게 잡으면 소위 교회 제직들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구실이나 체면도 있었겠지요. 또 이러 저러한 여러 구실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어려운 사람을 도울 처지가 못 된다. 이 세상에는 어차피 불행을 당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불행한 사람이 하나뿐인가? 불행은 그의 운명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불행한 사람을 구제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등등.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내 이웃을 버려두고 멀리서 못 본체 하며 지나갈 것인가? 마음속으로 ‘미안해, 미안해’하면서 이웃을 피해가며 살아 온지 몇 년이 되었던가? 10년, 30년, 60년, 70년, 80년. 그러면서 우리 앞에는 죽을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내 이웃을 피해가며 살았다는 것은 결국 예수를 피해가며 살았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를 피해가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십자가라는 것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자기도 강도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 맞은 사람에게 다가가서 자기의 최선을 다 했습니다.그는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을 돕기 위해서 받게 되는 희생, 이것이 결국 십자가가 아닐까요.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그 작은 십자가가 아닐까요?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십자가.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가 어디 있는지 찾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이웃을 도우려고 하기만 하면 십자가는 바로 내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추상적일 때 십자가 없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구체적일 때 십자가는 언제나 내 옆에 있게 마련입니다. 본회퍼의 말 대로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을 필요가 없읍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고 할 때에는 바로 옆에 있는 것입니다.

    구실

    그런데 우리에는 언제나 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도 지금 살기 힘든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이 우리의 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들과 1개월 동안 살면서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소록도의 추억

    1948년 1월 구력 정월 명절 때를 맞추어서 1개월 간 소록도(小鹿島) 나병 요양원 (갱생원, 更生園)에서 봉사하기위하여 다른 과의 의사 7명과 함께 떠나갔습니다. 서울을 떠나 여수를 거쳐 녹동까지 가서 배를 타고 600m 가량 떨어진 소록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당시 소록도에는 6천명이 넘는 나병(한센병) 환자가 있었는데 해방이 되자 일본 의사들은 다 철수하고 한국의사들도 이들을 돌보는 의사가 아무도 없어 방치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사 7명이 정월 명절을 이용하여 1개월 동안을 그곳에 가서 진료를 하는 동시에 환자 중에서 공부한 사람을 선발하여 간단한 응급처치나 대증요법을 가르쳐 훈련시키기로 하였습니다. 환자들 중에는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학생, 신문기자를 하던 사람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이 석여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병에 대하여는 치료약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전염력은 약한 병이지만 걸릴 것도 각오는 해야 했습니다. 옛날 Damien(1840-1889)이라는 사람은 Belgium에 태어나 신부가 되어 자원하여 하와이의 Molokai섬에 있는 나병 수용소에 들어가서 선교와 의료 활동 을 하다가 자신도 나병에 걸려서 49세에 사망하였습니다.

    소록도는 표주박같이 생긴 섬인데 그 당시 섬은 건강지대와 환자지대로 나누여져서 환자지대에서는 화폐도 그곳에서만 쓰는 화폐로 바꾸어 쓰고 있었습니다. 그 들 사이에서 이미 태어난 어린이들은 건강지대에서 부모와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1주일에 한번 정도 면회일이 있어서 경계선에 있는 초소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주일동안의 일어난 일들을 부모에게 고하다가 석양이 지면 부모와 아이들은 다시 헤어져야 했습니다.

    섬은 일곱 개 마을로 나누여져 있었는데 마을마다 교회가 하나씩 있어서 주일이나 수요일 저녁에는 교회는 환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도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병은 신경, 피부를 침범하는 병이어서 눈이 먼 환자, 코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환자,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진 환자 등 참으로 비참하였습니다. 병실에 가면 고기가 썩은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산지옥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먹는 식사도 형편이 없어서 잡곡밥에 국이래야 그저 소금국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변 가에 가서 조개를 줍는 환자도 있었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다고 비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록도에 한번 가보면 그래도 자기는 아직 행복하고나 하고 생각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위가 바다로 둘러 싸여 있지만 그 많은 환자들 중에서 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설날을 거기서 환자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설날이라고 하여 경증 환자들은 밖에 나와서 꽹과리를 치며 춤추며 흥겹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중환자를 위하여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아진 성금으로 중환자들을 위로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이렇게 밖에 나와 명절이라고 즐기고 있지만 중환자실에는 지금 신음하고 있는 환자들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하다 한들 이들 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36년 후 내 회갑 휴가 때 집 사람과 함께 소록도를 다시 찾아 갔습니다. 회갑 때 하필이면 소록도를 찾아갔느냐고 물는 사람도 있갰지만 나는 25세 때 명절을 그곳에서 보냈던 소록도를 다시 가 보고 싶었습니다. 36년 전 보다 환자 수는 많이 줄어 있었으나 그곳에 상주하는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 갔더니 서울의대 간호학과를 나온 간호사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공중보건의로 자원하여 소록도에서 일하고 있는 서 울의대를 졸업한 젊은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소록도 나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병 환자의 구두를 만들고 있는 미국 청년이 와있었습니다. 나환자의 변형된 발에 맞는 구두를 만들려면 특수한 기술이 필요한데 인도의 나병원에서 이 기술을 배워가지고 소록도에 와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공연히 간호사들의 구두까지 만들어주지 말아요!” 하는 병원장의 농담에 그는 미소로 대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순진하고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은 영영 이쳐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당시의 사람들은 혹시 갈릴레아 호수 가에서 예수를 직접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테레사 수녀(1910-1997)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도 바로 그 그리스도는
    보잘 것 없는 사람,
    직업이 없는 사람,
    버림받은 사람,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들 사이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수 없으므로
    우리의 사랑을 그에게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이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그에게 해 드리고 싶은 것을그 이웃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만지고 있을 때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있는 것입니다.

    장 바니에(Jean Vanier)는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십시오. 거기에 주님은 계십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4년 장애인 2사람을 자기 집에 다리고 와서 한 집에 살면서 “노아의 방주”라는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130 여개의 같은 이름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본회퍼(Bonhoeffer)는 “교회는 오직 타자(他者)를 위해 존재 할 때만 교회”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 만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교회안의 여러 공동체, 예를 들어 우리 장년남신도회도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그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 있을 때가 벌서 50년 전이었는데 그 때 어떤 교회는 젊은 교인들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댄스파티를 개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더니 “실업자모임”이라는 소모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직업이 없는 실업자(失業者)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기업을 하는 실업자(實業者)의 모임이었는데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모임이었습니다.

    옛날 어느 동네에 흑사병이 유행하여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장례식을 치르느라 바쁜데 교인들은 교회에 모여 교인들이흑사병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성장한 것이 아니라 비만증에 걸려 있습니다. 비만증에 걸려 결국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심각한 합병증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 다.

    우리 장년남신도회도 또한 타자를 위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타자를 위하여 무엇인가 할 일을 찾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만 미약하나마 우리교회의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2006. 4, 장년남신도회, 수련회 예배 설교)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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