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 본회퍼.jpg 디트리히 본회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지만 그를 따라 살려고 애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말씀과 삶, 역시 우리들에게 귀중한 것이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플로센뷔르크(Flossenbűrg)에서 교수형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그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써 가야할 길을 걸어간 참 인간이었기에 오늘날도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신 신경학 교수였고 어머니는 궁정 목사의 딸이었다.

    17세 때 튀빙겐(Tűbingen)대학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시작하였고 1년 후에는 베를린(Berlin)대학으로 옮겨 신학을 계속하였다. 1927년, 21세 때 “성도의 교제”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9년 “행위와 존재”라는 제목의 교수자격 논물을 제출하여 1930년 베를린대학에서 조직신학 강사 자격을 얻었다. 1930-31년 1년 동안 미국 뉴욕의 유니온(Union) 신학교에서 연구하였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고 총리에 취임하였다. 1933년 10월부터 영국의 독일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1935년(29세) 발틱 해에 있는 고백교회에서 세운 목사후보생을 위한 신학교의 책임자로 부임하게 된다. 이 신학교는 철저한 이론교육과 영적인 훈련과 그것의 실제적 적용을 하는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 신학교에서 강의했던 내용이 『나를 따르라』(Nachhfolge)와 『신도의 공동체』(Gemeinsames Leben)로 출판되었다.

    히틀러 치하에서 많은 학자들이 박해를 피하여 독일을 떠나 미국등지로 갔다. 라인홀드 니버도 본회퍼를 구하기 위하여 그를 미국으로 초청하였다. 본회퍼는 1939년 6월 독일을 떠나 뉴욕에 갔으나 곧 미국에 온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어 “동포와 함께 이 시대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라인홀드 니버에게 보내고 7월에 미국을 떠나 독일로 다시 돌아왔다.

    1943년(37세) 1월 본회퍼는 한 여자와 약혼을 하였으나 결혼을 하지 못한 채 1943년 4월에 히틀러 암살계획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본회퍼는 베를린 테겔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독서와 사색, 저술, 편지를 쓰면서 감옥 안에 함께 지낸 동료들에게 많은 인격적 감화와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히틀러 암살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그 후로 여러 감옥으로 이송되어 마지막으로 플로센뷜크(Flossenbűrg) 집단수용에서 1945년 4월 9일, 이른 아침 교수형에 처해졌다.(39세). 본회퍼의 최후를 목격했던 수용소 의사는 “나는 약 50년 동안 의사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신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그를 회고하였다.

    ‘교회’ 라는 공동체

    요즈음 ‘공동체’라는 말 만금 흔하게 사용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모임 마다 공동체라는 말이 붙어 다닌다. 수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다. 하나의 유행어같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교회’라는 공동체는 무엇을 하는 공동체일까?

    “예수는 오직 타인을 위해서 존재하였다.” 본회퍼는 예수를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로 보았으며, 교회 역시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교회는 오직 타자를 위하여 존재 할 때만 교회다”라고 하였다. 세상의 모든 단체가 자기 자신을 위해 있지만 교회만은 타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이다. 교회가 타자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 다면 그런 교회는 결국 취향이나 사회적 조건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는 하나의 친교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소모임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자기들만을 위한 모임은 결국 동아리 같은 모임에 불과할 것이다.

    이같이 교회라는 공동체는 타자를 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들은 자기 교회만을 위한 교회로 전락하고 있다. 고회안의 여러 작은 공동체들도 자기 자신들의 하나의 친목단체같이 되어가고 있다.

    교회의 적(敵)

    교회의 적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 본회퍼는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적(deadly enemy)은 “싸구려 은총(cheap grace)”이라고 하였다. 교회라는 시장에서 싸구려로 팔려나가는“은총”을 말하는 것이다. 그 싸구려 은총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짓이나 다 하며, 은총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똑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믿기만 하면 은총의 대가로 무엇이나 구할 수 있는 백화점 같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가 부르짖은 것은 값비싼 복음이었는데 루터교회의 후예들이 그것을 싸구려 은총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청년들을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다고 그들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댄스파티를 여는 것을 보면서 댄스파티를 해야만 모이는 교회라면 차라리 문을 닫아버리지 하고 생각한 일이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이 비슷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교인들의 흥미를 끌기 위하여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교인들이 자기가 재미있는 것을 골라잡을 수 잇도록 여러 가지 모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형교회들은 마치 하나의 기업체같이 돌아가고 있다. 예수는 사라지고 교회라는 기업만 흥하고 있다.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이고, 미국보다 더 미국적이 되어버린 교회, 그것이 한국의 대교회의 모습이 아닐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이 세상 속에서 “깨어” 있으며 예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고통과 무력함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

    본회퍼는 하나님의 초월을 피안의 초월로 보지 않고, 인간의 삶 한가운데 있는 초월을 보았고, 하나님의 전능을 그의 권력과 지배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이 세상 속에서 고난당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돕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았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것처럼, 무력한 하나님, 이것이 그가 본 하나님이었다. 본회퍼는 하나님을 그의 강함이 아니라 그의 약함에서, 그의 권능이 아니라 그의 무력 속에서 보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전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결국 인간의 종교적 욕구와 권력의 투사일 뿐이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그가 감옥에서 남긴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라는 시 속에서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다.
    그들은 도움을 간청하고 행복과 빵을 구하고,
    질병,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들 모두가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다.
    그리고 가난하고 모욕당하며, 집과 빵도 가지지 못한 그를 발견하고,
    죄와 약함과 죽음에 삼킨 그를 바라본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 곁에 서 있다.

    자유의 도상에 있는 정거장

    훈련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하거든,
    욕망과 육채가 그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감각과 영혼을 훈련하는 법을 배워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케 하고,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순종하라.
    훈련을 거치지 않고 자유의 비밀을 경험한 사람은 없다.

    행동
    순간의 쾌락에 동요되지 말고, 정의를 과감히 행하고,
    가능성속에서 헤매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대담히 붙잡으라.
    자유는 생각의 도피 속에 있지 않고, 오직 행동 안에만 있다.
    오직 하느님의 계명과 그대의 믿음만을 의지하여
    두려워 주저하지 말고 사건의 폭풍 속으로 나아가라.
    그리하면 자유는 그대의 혼을 환호하며 맞이할 것이다.

    고난
    놀라운 변화, 힘차고 살아 있는 손이 그대에게 연결되어 있다.
    무력함과 고독 속에서 그대는 그대 행동의 종말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안심하고, 믿으며, 더 강한 손 안에서 위로받으며
    조용히 만족한다.
    오직 한 순간 동안 그대는 환희에 넘쳐 자유를 맛보았지만,
    그대는 자유를 하나님에게 맡겼다.
    그분이 자유를 영광스럽게 완성하시도록.

    죽음
    자, 이제 오너라. 영원한 자유에의 도상에 있는
    최고의 축제인 죽음이여.
    우리의 덧없는 육신과 현혹된 우리 영혼의
    무거운 사슬과 장벽을 부수고,
    이 세상에서는 보기를 꺼리는 것을 마침내 보기 위하여.
    자유여,
    우리는 오랫동안 훈련과 행동과 고난 속에서 그대를 찾았다.
    그런데 이제 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속에서 그대 자신을
    본다.
    ('저항과 복종' <옥중서간>)

    우리는 예배 순서 끝에 목사님의 파송의 말씀 중에 “자유인이 되시오” 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깨달지 못하고 있다. 자유는 오직 훈련과 행동을 통하여서만 얻을 수 있다. 훈련 없는 자유는 우리를 욕망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행동 없는 자유는 우리를 개인주의에 빠지게 한다. 참된 자유를 찾는 사람은 정신과 육체를 정결케 하고, 감각과 영혼을 훈련해야 한다.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고난을 받고, 무력함과 고독 속에서 지치고,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게 된다. 세상은 죽음을 보기를 꺼린다. 그것은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자유의 끝이 아니라 자유의 시작이요, 자유의 도상에 있는 마지막 정거장일 뿐이다.

    그가 39세가 되던 해, 그리고 나치정권의 패망을 눈앞에 바라보던 때였다. 죽음 앞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커다란 울림을 남기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 나는 모든 국가적 이해를 뛰어 넘는 전 세계적인 그리스도인의 형제 됨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승리가 우리에게 확실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말은 본회퍼가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그 수용소에서 불법적인 약식재판 후에 교수대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치체스터의 조지 벨(George Bell) 감독에게 전하도록 그의 동료 죄수인 영국군 장교 패인 베스트(Payne Best)에게 남긴 말이다.

    나는 누구일까?(Who am I?)

    나는 누구일까?
    남들은 흔히 나더러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침착하고, 명랑하고, 자신이 있어 보이는지
    마치 자기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일까?
    남들은 흔히 나더러 말하기를
    간수들과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한지
    마치 내가 그들의 상관 같다고 하지만.

    나는 누구일까?
    남들은 또 나덜어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보내는 나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평온하고, 웃고, 당당한지
    늘 승리에 익숙한 사람 같다고 하지만.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일까?
    또는 내 자신이 알고 있는 내가 참 나일까?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리워하며 허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색깔과 꽃들과 새소리가 그리워지며
    정다운 목소리와 이웃에 굶주리며
    석방의 날을 기다려 몸부림치며
    먼 곳에 있는 친구들의 안부를 맥없이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허탈에 빠진 나
    풀이 죽어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려고 하는 나.

    나는 누구일까?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오늘은 이 사람이었다가 내일은 저 사람일까?
    혹은 둘 다 일까?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나 자신 앞에서는 한없이 불쌍한 약자일까?
    이미 결정된 승리 앞에서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패잔병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누구일까?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오, 주여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옥중서간)

    본회퍼감옥.jpg 본회퍼가 수감되었던 테겔 형무소 감방

    감옥 안에서의 본회퍼의 주 관심사는 감옥의 환자나 동료 죄수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허락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불안과 걱정에 싸인 동료 죄수들에게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주었다. 그의 침착하고 조용하고 태연한 자세는 동료들에게 존경심을 주었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거대한 인물로 보이는 그였으나 하나님 앞에 선 자기 자신은 어린 아기에 불과했다. 삶을 향한 그리움, 부모형제 자매,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노래와 담소로 즐거웠던 옛날의 추억, 그는 또 하나의 인간이었기에 나약한 육체와의 싸움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보는 나,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나약한 나, 그 양자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정 나일까?,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라고 하고 있다.

    불의 앞에서 침묵할 수 없었던 그의 삶

    본회파에게 늘 제기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평화주의자인 목사가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감옥에 수감되어있던 한 이태리인이 본회퍼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더니 본회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모라 질주한다면 목사인 나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며 가족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수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그 당시 미친 운전수인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본회퍼는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죄다. 계명은 구체적인 것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는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본회퍼는 39세의 짧은 생애에 비해 8000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분량의 원고를 남겼지만, 체계적인 조직신학이나 윤리학의 대계를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회에게 말하는 것은“기도와 사람들 사이의 정의의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 현실과 신앙과 삶의 일치 속에서 “눈을 뜨고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본회퍼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이며 교회란 무엇인지를 그가 그의 삶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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