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피난살이
  • 제주피난.jpg
    1951년 제주도 한림교회

    6.25동란으로 폐허가 되었던 서울대학교병원이 유엔군의 서울 수복으로 복구의 꿈에 부풀었던 것도 잠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처음 인민군이 서울을 쳐들어왔을 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여 죽을 고생을 다 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서둘러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웃에 살던 환자 보호자가 자기 고향인 영천으로 피난을 가는데 함께 가자고 하여 나는 우선 그들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 남편은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전선이 점차 후퇴함에 따라 대학병원도 개원한지 얼마 안 되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어 부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나는 영천에 있다가 부산으로 가서 남편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의 일부가 제주도 한림에 구호병원을 설치하게 되어 1951년 1월 17일 배를 타고 제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금 70리가량 남쪽에 있는 한림으로 가게 되었다

    한림에 도착하니 마을 사람들이 달구지를 끌고 나와 짐을 직접 실어 날라주었다. 숙소는 민간 집을 빌려 쓰게 되었는데 주민들은 자기 집의 좋은 방을 우리들에게 내 주고 자기들은 오히려 헌 방을 쓰고 있었다. 제주도의 인심이 얼마나 좋은가를 몸소 느끼며 감사하게 생각했다. 병원 식구들은 각각 다른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우리는 태양여관이라는 여관을 하던 집의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제주도를 삼다(三多), 삼무(三無)의 섬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삼다’ ‘삼무’의 섬이었다. ‘삼다’라 함은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말이고 ‘삼무’라 함은 거지, 도둑, 대문이 없다는 이야기다. 한라산의 화산 폭발로 생긴 섬이라 집집마다 돌로 담이 싸여져 있었고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지붕이 날려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그물처럼 얽어 묶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자들은 본토나 일본으로 많이 출타했기 때문에 여자가 확실히 많아 보였다.

    제주도민은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정직하기 때문에 거지가 없고 도둑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집에는 대문이 없고 다만 사람이 집을 비울 때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로 ‘정낭’이라고 해서 나무를 양옆 돌기둥 구멍에 걸쳐놓았다. 나무 한 개를 걸쳐놓으면 주인이 잠시 나갔다 온다는 표시고, 두 개를 걸쳐놓으면 저녁때 집에 돌아온다는 표시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풍습은 피난민이 많이 제주도로 이주하면서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

    부엌의 온돌 구조가 본토와 달라서 불을 때면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랫목만 돌고 다시금 부엌으로 나오기 때문에 부엌은 연기로 자욱했다. 밥을 짓노라면 눈물을 많이 흘려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안과 환자가 유달리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대학병원은 구호병원을 개설하여 1951년 2월 23일부터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병원이라고 하지만 한림 면사무소의 창고를 빌려서 판자로 칸막이를 하고 지료를 하는 것이었다. 피난민은 물론이고 그곳 주민들도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다. 그래서 환자는 매일같이 많이 모여들어 아침 진료시간이 되기 전에 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의 진료가 끝나면 맑은 날에는 함께 부두에 나가서 비양도를 바라보며 하루의 피곤을 풀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도는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 많아서 피난 생활을 서글프게 하였다. 그러나 다행하였던 것은 바로 가까이에 한림교회가 있어서 주일과 수요일 저녁에는 교회에 나갈 수가 있었다. 이 교회는 제주도에서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로서 강문호 목사님이 당회장으로 계셨고 그 마을의 의사가 그 교회의 장로님으로 계셔서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구호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그 때 간호사는 대개 임시 간호사로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여학생이 많았다) 중에 신자들이 있었고, 또 한림에 피난 온 보육원의 보모가 오르간 반주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가대를 조직하여 예배를 도울 수 있었다. 남편은 음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성가대장을 맡아서 악보를 그려 등사기로 찍어내기도 하였다.

    한림에 있는 동안 1952년 3월에 안병무 선생이 6.25로 사방에 흩어저있는 일신회 친구들을 방문하는 중에 우리가 있는 제주도 한림까지 18시간이나 걸리는 뱃길을 찾아와서 반갑게 만나 뵐 수 있었다. 일신회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하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한림까지 모처럼 오는 기회에 한림교회에서 기독교 강연회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목사님과 상의하여 1주일 동안 집회를 가졌는데 2-3백 명이 넘는 청중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때 강 목사님은 안 선생의 강연을 들으면서 이런 강연은 보통 목사로서는 1년에 한 번 하기도 힘든 내용이라고 하면서 가연을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제주도에 와 있었지만 제주도는 그 당시 4.3사건 이후 한라산 쪽을 향하여 돌아가면서 돌로 성을 쌍아 출입을 못하도록 하고 군경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한라산으로는 갈 수가 없었고 해변밖에 볼 수사 없었다.

    1951년 7월에 한림에 있던 대학병원은 부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구호병원을 완전히 철수할 수가 없어서 소아과와 외과 의사가 1명씩 남게 되어 우리는 외과의 김헌종선생과 함께 한림에 더 머물게 되었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1952년 4월 13일, 부활절 아침에 영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성령강림주일에 한림교회 강문호 목사님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되었다. 피난 중에도 분에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

    구호병원이라 보건부에서 나오는 월급은 근소하여 생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같이 병원에서 근무하던 외과 선생의 어머니와 함께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비를 보충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 주민 환자들이 고구마, 생선 등을 가지고 와서 고마워하던 그 훈훈한 인심은 우리의 힘든 것을 잊고도 남음이 있게 해 주었다.

    피난생활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 마음속 깊이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준 제주도 한림을 48년 만에 다시 찾아가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피난 시절에 있었던 교인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다만 새로 지은 한림교회 마당에 강문호 목사님의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Goto Family Home
Copyright ⓒ 2011 Sukchun & Rorobrain. All rights reserved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