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을 살리는 평화
  •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로마서 12장 18절)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더욱이 향린교회에서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금년으로 나이가 80인데 제가 30세 때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향린교회를 설립하여 금년이 바로 향린교회 창립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인생에서 행복한 조건중의 하나가 뜻이 맞는 좋은 친구를 만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만나서 서로 사귀는 모임을 통해서 좋은 신앙의 친구를 만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일신회(一信會)라는 신앙의 모임을 통해서 만난 절친한 친구로 안병무(安炳茂)박사가 있었는데 6년 전에 소천하여 지금은 그가 남긴 글을 통하여 그와 사귈 수 있을 뿐입니다.

    나의 일생을 통하여 나에게 영향을 준 책 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중 제일은 성서이지만 그밖에 예수를 따라서 살려고 애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그들이 남기고 간 책들은 나에게 더 없이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저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분들로서는 성 프란씨스(St. Francis, of Assisi, 1181-1226),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1997) 등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생애를 통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모임은 의료인의 모임이므로 그 중에서 슈바이처의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슈바이처라고 하면 의료인들에게는 너머나 잘 알려진 인물이므로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도 되지만 요즘 들어서 슈바이처의 사상이 정말로 이 시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점이 많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됩니다.

    슈바이처는 신학자이고 철학자이고 음악가이며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의사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이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고 해서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우리가 신자가 되는 경로를 보면 베드로 같이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예수가 좋아져서 제자가 된 경우도 있고,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를 반대하다가 획기적인 회심을 통하여 제자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조부님과 부친이 둘 다 장로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서 언제 기독교인이 된지도 모르게 그냥 되었습니다. 슈바이처는 “예수와의 진정한 관계는 예수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대답은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이제는 예수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요한복음 21장, 15절).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그리운 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획기적인 회심을 통해서 일어날 수도 있고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 일어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할 때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녔습니다. 1학년 때 기숙사생활을 하였는데 같은 방에 5학년 상급생인 종교부장이 있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부흥회에 많이 따라다녔습니다. 그가 나가는 교회가 성결교회였는데 그 교회 분위기는 대단히 열광적이었습니다. 큰 목소리로 기도하면서 어떤 영감을 받은 것 같은 풍경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나에게는 왜 이런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적인 사건만이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베드로모양으로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었을 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할 수 있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바이처는 “철저한 회의를 거치지 않은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니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파스칼은 천재적인 과학자였지만 그는 또한 단순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회의하고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신앙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理性)이 가장 이성다운 점은 자기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슈바이처는 30세에 의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이미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24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27세에 신학과 교수의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30세에 의학을 공부하게 된 동기는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아프리카의 선교가 아주 어렵다는 기사를 보고 아프리카에 갈 생각을 했는데, 아프리카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의사라는 기사를 보고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면서 의학을 공부하여 38세 때 의학박사를 취득하고 적도 아프리카에 가서 병원을 개설하고 흑인들을 위하여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88세까지 의료봉사를 한 것입니다.

     27세에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 자격을 얻었는데 교수가 되지 않고 아프리카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기 위하여 의사공부를 시작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다 말렸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고 흑인들을 노예로 부려먹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백인으로서 이것을 속죄하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가 질 무렵, 배가 바로 하마의 떼를 뚫고 지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생에 대한 외경심(畏敬心)’ 이라는 말이 내 앞에 떠올랐다”고 합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모든 생명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모든 생활에서 이것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살려고 하는 의지에 대해서도 자기 것에 대했을 때와 똑 같은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의 삶을 자기를 위해서만 아니라 자기가 접촉하는 모든 삶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운명를 자신 속에서 체험하고 가능한 도움을 주고, 자기가 일함으로써 이룩된 다른 생명의 조장과 구제를 가장 높은 행복으로 느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와의 정신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들에게 등급을 매겨서 보편 타당한 가치의 차이를 두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느낌에 따라서 어떤 생명이 우리 인간에게 더 가깝게 느껴지고 어떤 생명은 더 멀게 느껴지게 됨으로써 그 생명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완전히 주관적인 표준에 불과하다. 이런 차별의 결과로 세계에는 무가치한 생명이 존재하게 되며, 이런 생명은 해치거나 없애버려도 무방하다는 견해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무가치한 생물이라는 것들 중에 여러 가지 곤충류, 원시인들이 포함되게 된다”. “진정으로 윤리적인 인간에게는 비록 우리 인간이 보기에 저급한 생물같이 보일지라도 모든 생물은 신성한 것이다.” 즉, 고귀한 생명과 천한 생명, 가치 있는 생명과 가치 없는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나는 수면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약이 나온 것을 기뻐한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수면병을 일으키는 병균을 들여다 볼 때마다 나는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 생명을 꼭 죽여야만 하는가에 대하여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의 윤리는 오로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동물학대를 오락으로 삼는 민중의 취향을 일반 여론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하는 시대가 언제나 찾아 올 것인가!” 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길가에 돋아나고 있는 풀을 발로 짓밟고 지나가거나 꽃을 꺾는 다는 것은 악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동물을 조금도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상주의자라는 말을 들기도 했지만 그의 생에 대한 외경심은 모든 생물에 대해 해당이 되었습니다.

    요즈음에 와서 인간들은 환경에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여 이간들의 무작정한 자연파괴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이것은 근본 정신에 있어서 슈바이처의 생에 대한 외경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인류가 이대로 자연을 파괴하다가는 인류도 함께 멸망하겠기에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온,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의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생물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살려는 의지를 가진 생명체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는 지구상의 인구의 수보다 많은 세균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주로 장관이나 폐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균들을 죽이는 항생제를 쓸데없이 많이 쓰고 있습니다. 감기에는 항생제를 쓸 필요가 없는데도 항생제를 쓰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 몸 안에 공생하고 있는 많은 균들이 죽거나 또는 항생제에 들지 않는 내성균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과 세균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던 생물간의 화해가 깨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즉 생명간의 평화가 깨져 버립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자비의 계명을 진리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여러 세기 동안 이에 근거하여 노예 제도, 마녀, 화형, 고문, 기타 여러 가지 고대 또는 중세기적인 비인도적 행위에 항거하지 않았다”고 슈바이처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십자군을 일으켜 무자비한 전쟁을 감행하였고 기독교국이라는 서양국가들이 인디안 들을 몰아내고 세계 여러 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지금의 번영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 <나의 생애와 사상 (Aus meinem Leben und Denken, 1931)>의 끝 부분에서 “이제는 내 머리도 백발이 성성하게 되어 간다. 혹사당한 나의 육체는 괴로워 노령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내 삶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내와 어린아이에게 바치고 싶은 시간도 거의 없었다”. “ 체념해야 할 시기가 오면 태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만사에 대비한 겸손한 마음으로 앞날을 바라본다. 행동인으로서든지, 수난자로서든지 우리는 이성(理性)보다 더 높은 곳에 존재하는 평화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의 힘이 진실임을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195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슈바이처는 <평화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라고 하는 로마서 12장 18절의 성경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여기의 평화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국가와 국가사이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 해야 되는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온 세계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막대한 군사력으로 밀어 붓첬던 이라크전쟁은 상대가 되지도 않는 일방적인 게임으로 끝났습니다. 패권주의와 무력이 판을 치는 세계는 곧 야만의 세계입니다. 그 세력이 영원히 위력을 발휘할 것 같으나 언젠가는 로마제국과 같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강한 힘을 가진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풍미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평화를 위하여 몸을 바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뒤에는 하느님의 정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는 수백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굶주리고 있고 수많은 부상자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약을 보내고,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는 일을 우리는 도와 주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의사들은 이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서서 우리의 의사를 더 적극적으로 표현했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큰 숲 전체가 타 들어오고 있는데, 한 나무의 잎사귀에 있는 반점 하나를 없이 해 주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의사의 존재의 목적이 있다면 지금처럼 죽음의 세력, 야만의 세력이 팽배한 시대에 의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평화, 민족과 민족사이의 평화, 국가와 국가사이의 평화, 사람과 모든 생물사이의 평화는 오로지 슈바이처가 말하는 모든 생에 대한 외경심을 가질 때 비로써 가능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생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몸서 일생을 살아간 슈바이처의 생애 속에서 우리는 그 서광을 볼 수 있습니다.

    (찬송 531장 :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는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저녁에 하루의 진료를 끝마치고 자기 직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잘 불렀던 찬송가입니다)

    (2003. 5.2 기독청년의료인회 제6회 생명기도회)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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