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2008. 7. 15) 서울노회 중구시찰회가 주관하는 개성방문 스케줄에 따라 개성을 방문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나로서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한 번이라도 더 북녘 땅을 밟아보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우리 교회에서는 두 목사님을 비롯하여 8명이 동행하였다(사진 1). 버스로 도라산에 위치한 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하여 해외여행이나 비슷한 수속을 밟고 지정된 버스로 가라 타고 군사 분계선을 넘어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개성관광의 첫 번 코스는 박연폭포였다. 나는 해방 전에 개성에 온 일이 한번 있었다. 그 당시 개성에 서울대학 생약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에 친척 되는 사람이 직원으로 있어서 그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그 때 선죽교를 가 본 일은 있으나 박연폭포는 말로만 들었지 가보지는 못했다. 박연폭포는 지금은 포장된 도로로 차로 달리면 30분밖에 안 걸리지만 옛날에는 몇 시간을 걸려서 걸어가야 했다.
박연폭포는 금강산의 비룡폭포(높이 82m), 설악산의 대승폭포(높이 88m) 에 이어 우리나라 3대 폭포 중의 하나이다(높이 37m) (그림 2). 우리가 갔을 대는 수량이 많아 더욱 웅장하게 보였다. 폭포아래에는 지름이 40m 되는 소(고모담) 이 있고 폭포 위쪽에는 지름 8m 쯤 되는 연못이 있다. 그 연못 한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사진 3). 천마산에서 흘러나려 온 물이 바가지 같이 생긴 연못(박연, 朴淵)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37m 아래에 있는 고모담(그림 2)으로 떨어지며 장관을 이룬다.
박연폭포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박(朴)씨 성을 가진 진사가 있었는데 이 바위위에서 피리를 불자 그 피리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물속에 살던 용왕의 딸(용여)이 그 피리소리에 반하여 용궁으로 데려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박 씨의 어머니는 아들을 찾다가 폭포에서 떨어져 숨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연못의 이름이 박연(朴淵)이고 폭포 아래의 소의 이름은 고모담(시어미소,姑母潭)이 되었고 폭포의 이름은 박연폭포(朴淵瀑布)로 불린다는 것이다.
고모담 물속에 바위(용바위)가 솟아나와 있는데 그 바위위에는 여러 가지 글들이 삭여져 있는데 그 중에는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휘둘러 썼다고 전해지는 이백의 시‘여산 폭포를 바라보며’중의 두 구절이 삭여져 있다. 고모담 동쪽에는 범사정(柉楂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 정자에 앉으면 박연폭포를 잘 발아 볼 수가 있다.(사진 4.)
나는 이 박연폭포를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작고한 최봉삼 장로가 잘 부르던 ‘박연폭포’라는 노래였다.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놀다가 흥이 나면 언제나 부르던 노래가 이‘박연폭포’라는 노래였다. 최장로 자신이 실제로 박연폭포를 찾아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노래를 자주 불러 주었기 때문에 나도 어느 정도 따라서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였다.
‘박연폭포’로 시작되는 이 민요는 개성난봉가로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든다.
[후렴] 에 ~ 에 ~ 에헤야 에 ~ 에루화 좋고 좋다. 어러럼아 디여라 내 사랑아.
박연폭포가 제 아무리 깊다 해도 우리 양인의 정만 못 하리라.
[후렴] 에 ~ 에 ~ 에헤야 에 ~ 에루화 좋고 좋다. 어러럼아 디여라 내 사랑아.
삼십장 단애에서 비류가 직하하니 박연이 되어서 범사정을 감도네.
[후렴] 에 ~ 에 ~ 에헤야 에 ~ 에루화 좋고 좋다. 어러럼아 디여라 내 사랑아.
후렴을 반복하면서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난봉가는 황해도 지방에 가장 많아서 이 노래도 그 영향을 받아서 황해도 민요에 가까우면서 경기 민요에 속해 있다.
최봉삼 장로는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방 전에는 만주 북간도에 있을 때 장하구 선생이나 안병무 선생과 알게 되었고 향린교회에서는 1960년 나와 같은 해에 장로로 취임하였다. 원래가 온화한 성품과 풍부한 인간미와 소박한 인품을 가지고 있어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 분이었다. 그리고 향린교회를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드리는데 성의를 다 하였다. 등산이나 정구 등을 함께하며 교인들 간의 침목을 도모하였다(사진 5). 때로는 무의촌 진료반과 함께 나와 진료를 돕기도 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개성관광에 함께 와서 범사정에 앉아 실제로 박연폭포를 바라보면서‘박연폭포’를 큰 소리로 함께 불러볼 수 있었을 것을 그가 없음을 아쉬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