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백년 이상이나 한국 (조선)에 대하여 크나큰 죄를 저질러온 일본 정부가 이에 대하여 성실하게 사죄하기 전에는 한국 땅을 내 발로 밟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향린교회의 초청을 받고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가라”는 음성을 듣고 오랫동안 내 자신에게 가하고 있었던 금지를 풀고 한국에 올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68년부터 재일 한국인의 인권을 위하여 애써왔던 그가 1995년 7월에 비로서 한국을 방문하여 향린교회에서 강연을 하면서 꺼낸 첫 말이다.
나는 그가 서거하였다는 소식을 한겨레신문의 기사 (2005. 9. 26, p. 20)를 통하여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즉시로 그가 다니던 일본 교토 기다시라가와교회(北白川敎會) 사에끼(佐伯)목사 댁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사에끼 목사는 마침 대만에 가서 집에 안계시고 사에끼 목사 부인의 말에 의하면 이이누마 교수는 그가 죽으면 장례식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하지 말라고 하여 화장만 하고 장례식도 하지 않아 아무한데도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이누마 지로씨는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명예교수로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그는 전공분야에서 30여권의 많은 책과 논문을 써낸 우수한 학자이지만 1969년 임석균(任錫均)이라는 조선 사람을 구해내는 운동을 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인이 일본에서 얼마나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가 하는데 관심을 갖게 되어 재일 조선인의 인권 획득을 위해서 정력을 쏟아 부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언론들은 이런 문제를 전연 다루지 않기 때문에 그는 “조선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재일 조선인이 얼마나 차별을 받고 있는가 하는 실상을 낫낫이 일본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재일 조선인”, “일본제국주의하의 조선 전도(傳道)”, “조선총독부의 미곡검사제도“, ”식민지 조선의 사회와 저항“, ”재일한국인을 말한다“ 등 여러 권의 책을 발간하였다.
박정희군사독재 정권시대에는 기다시라가와교회 오꾸다 목사와 함께 5명이 미국의 유명한 신문 ‘뉴욕 타임스’ 의 일면 전면에 한국 인민을 억압하고 있는 박 정권을 미국이 지지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의견광고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베트남전쟁 때는 매달 한번씩 80회 이상 교토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에 나가서 반전 시위를 하였다.
일평생 신앙적 양심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살려고 애썼던 학자 이이누마 지로 교수!, 그는 또한 우리 재일동포의 인권 획득을 위해 누구보다 더 열정을 기울였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서거소식을 접하면서 그가 우리 재일동포를 위해서 쏘다 부었던 온정에 대하여 심심한 감사를 표하며 그가 이 땅에서 걸어온 발자취가 우리의 발걸음을 비쳐주는 등불이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그가 향린교회에서 했던 강연 내용은 “기다시라가와교회와 향린교회의 만남” 1995, p. 92 에 실려 있음)
(2005.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