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이라크전을 국제법을 위반한 야만적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유일무이한 슈퍼 파워의 도덕적 추락을 개탄하였다.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약식강육의 세계가 다름 아닌 야만의 세계 일 것이다.
가족 중에 남자 3명이 지난 9일 밤 검문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군에게 사살 당했다는 소식을 들고 통곡하고 있는 이라크의 한 가족들의 모습이 신문지상에 나와있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미군은 이것을 정당방위라고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여군 제시카 린치 일병의 구출 작전을 2시간 짜리 영화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 옛날 청교도들이 첫 수확을 거두어드리고 가족들이 교회로 향하고 있는 그림이 머리에 떠오른다. 우리는 그 그림을 감격적이고 낭만적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는 총을 들고 있는 그 모습이 성경책은 자기 가족을 위해서, 총은 인디언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여지기도 한다. 자기 백성들에게는 고도의 민주주의를 해당시키면서, 다른 민족에게는 고도의 살상력을 가진 초현대 폭탄을 퍼붓는 것을 서슴지 안는다.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대량 살상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한 나라는 미국이 아니었던가. 그 당시 원자탄을 떨어 뜰이지 않아도 일본은 미국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이번 이라크 전쟁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는 것은 세계가 다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애원하는 눈동자
이라크 어린이의 애원하는 순박한 눈동자! 아무도 호소할 데 없는 그 눈동자!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보는가? 그 눈동자 속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를 보고 있지 안는가?
이라크인 들이 부르짖고 있는 처절한 목소리! 이제는 지쳐서 목소리도 안나오고 눈물도 다 말라 버린 지 오래이다. 침묵하는 신을 향해 부르짖는다.
우리는 죽어간다.
우리는 침묵 속에 죽어간다.
왜 우리는 울지 못하나.
불 위를
가시덤불 위를
걸어갔다.
우리 백성들이 걸어갔다.
우리가 왜, 주여!
(압둘 와합알 바야티, “우리는 왜 유랑지에 있나?” 에서 )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4월 2일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이 사악한 자들의 손에 역사를 방치한 듯이 보여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침묵은 역사를 방기하는 것 같은 부재가 아닙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정적 개입의 전주곡에 지나니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