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의 회상
  • 금년은 6․25가 일어 난지 45년이 되는 해이지만 지방자치제 선거에 온갖 정신이 팔려 신문지상에도 6․25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지자제 선거에 관한 기사로 가득 차 있다.

    내가 6․25를 맞이한 것은 자하문 밖 승가사 근처에 있는 수도원에서였다. 서울대학교 기독 학생회 모임에서 특히 자주 만나게 된 친구들이 '일신회'라는 신앙동지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 일신회원 중에서도 더욱 신앙적으로 깊이 사귀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6명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기도하는 가운데 결단하기 위하여 1950년 6월 23일 저녁부터 이 수도원(이곳은 천주교의 수도원이 아니고 신교의 기도원이었다)에서 기도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서울 시내를 다녀온 한 주민을 통하여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6․25가 터졌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계속하려던 기도회를 중단하고 구국기도회를 드린 후에 6월 26일 산을 내려와 효자동에서 서로 헤어졌다.

    인민군은 의정부 쪽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서울을 향하여 쳐들어오고 하나밖에 없는 한강철교는 폭파되어 한강교를 통한 피난길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피난 짐을 리어카에 싣고 뚝섬 쪽을 향하게 되었다. 뚝섬에 다다라 보니 많은 피난민이 강가에 나와 있는데 보트를 타고 강 건너편에 간 사람들은 다시 강북 쪽으로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배가 강 저편으로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영수학원에서 가르쳤던 한 학생이 나를 알아보고 강 저편으로 자기 짐을 나른 후에 다시금 강을 건너와서 나를 날라다 주어서 남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강을 건너간 후에 남쪽을 향하여 피난길을 서둘러 보았으나 그때 집사람은 임신 말기에 가까웠고 피난 짐을 걸머지고 아무리 애써 보아도 얼마 갈 수 없었다. 해가 저물어 하는 수 없이 피난을 가고 집주인이 없는 빈 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밤중에 우리가 머물러 있는 마을을 사이에 두고 밤새도록 양쪽 군대의 사격전이 벌어졌다. 밤 동안에 전쟁 틈에 끼어서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새벽 가까이 되니 총성이 멈추고 집밖으로 나가 보니 전선은 이미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는 남쪽으로 피난을 갈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금 서울을 향하여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돌아오면서 보니 논두렁에는 창검에 찔려 죽은 군인의 시체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그 끔찍한 전쟁의 참사를 눈앞에 보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1.4후퇴로 제주도로 피난을 가게 되기까지 그 동안 죽을 뻔 한 것을 다 헤어 보면 5-6번도 넘을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넘기고서 내가 살아남게 된다면 일생 동안 어떤 고생을 당하게 되든지 간에 이때 겪었던 고통을 회상한다면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부상병들로부터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족상잔의 비극 상을 많이 들었다. 한 군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돌격전이 벌어졌는데 인민군이 총검을 가지고 와아! 하고 고함을 지르며 돌격해 들어가 국군의 배를 찔렀는데 그 국군은 창으로 배를 찔리면서도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 오는 인민군의 입 속으로 자기의 손을 목구멍까지 넣고 잡아채서 결국 둘이 다 같이 쓰러져 죽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한국사람 같이 지독한 민족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무서운 민족이 자기 동족끼리 서로 싸우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비참한 전쟁이었던가.

    6․25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6․25의 참상을 말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한다. 6․25는 우리 민족에게 수백만의 사상자를 냈고 천만 이상의 이산가족을 만들었고, 온 강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우리나라의 모든 문화를 10년 이상 후퇴시켰고 남북 분단의 장벽을 더욱 높게 쌓아올렸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역대 독재정권에게 독재의 구실을 주었고 남북한 쌍방이 군비에 엄청난 국가 예산을 투입함으로써 남북한 국민 모두에게 재정 부담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 끔찍한 동족상잔의 전쟁, 이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인구의 80% 이상이 이 6․25를 경험하지 않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5세 이전의 일은 잘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현재 50세 이하의 사람들은 6․25전쟁을 알지 못할 것이다.

    6․25 전쟁의 참상에 대해서는 수많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방영이 되었으므로 내가 겪은 적은 경험과 서투른 표현으로 지금 이것을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참상을 약화시킬 뿐이므로 이 이상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전쟁이 다시 이 땅에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남북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전쟁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 무릇 이데올로기는 민족을 살리기 위한 것이므로 온 민족을 죽이는 이데올로기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사야 2:4의 말씀대로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야”하는 것이다.

    1995년 6월 23일 일본 NHK 방송에 의하면 맥아더 장군은 6․25때 북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고 대통령 선거에 유리하다고 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원폭 투하를 여러 번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 때 사용될 원폭은 나가사끼 원폭의 3-4배 수준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맥아더 장군이 한국을 전쟁에서 구해 준 구세주같이 생각하고 있다. 원자폭탄 투하를 건의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투하했을 때 초래되는 인명의 살상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했는지 몰라도 그것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는데 유리하다는 것을 조건의 하나로 내세웠다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995년 4월 31일 워싱톤 포스트지의 보도에 의하면 미 행정부는 작년 5월 북한과 핵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북조선 영변 핵시설을 폭격하는 동시에 수십만의 미군을 동원하여 북조선과의 전면전쟁을 일으킬 것을 수차례 검토하였다고 한다. 당시 폐리 미 국방장관은 미군을 한국으로 운반하는 구체적 일정까지 검토하고 실제 모의 전쟁 실험까지 실시하였다고 한다. 핵무기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핵무기의 사용까지 검토하였다고 한다. 한반도에 재래식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군 8-10만 명을 포함하여 100만 이상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고 추산하였으며 전쟁 비용 1조억 불에 달할 것을 예측하였다.

    한국민에 10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천문학적인 재산의 손실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이러한 가공할 만한 전면전쟁을 미국 정부는 어떻게 감히 발상할 수 있단 말인가? 세계 평화에 대해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며 또한 무기 판매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나라도 미국이다. 전체 무기 판매가의 75%를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의 몇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무기를 팔아먹고 있는 나라에게는 가능한 모든 제재를 가하고 있다.

    미국은 1862년 내전이 있은 후 지금까지 한 번도 본토 공격의 위협을 받은 일이 없다. 그리고 미국을 위협하는 이웃나라도 없다. 그런데도 ‘국가안보’라는 명목 하에 세계 군사비의 반 가까이나 되는 엄청난 국방비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미국이 원하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Pax Americana).

    지금 지구상에서 큰 위협 중의 하나는 현대화 된 무기가 확산되는 것이다. 미 하원 내부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방예산은 87년부터 93년 사이에 35.9% 증가했으며, 인플레를 감안한 이 같은 상승률은 일본, 중국 및 대만 등 비하여 훨씬 높은 것으로 분석되었다. 미 하원 국제 관계 위에 제출된 내부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93년 한국의 국방비는 1백 21억 달러 달하며 이것은 아시아 주요국들 중 일본 다음으로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해 중국 75억 달러. 인도가 63억 달러, 태국이 32억 달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각각 20억 달러로 되어 있다. 물론 한국은 분단 상태에서 북한이 대결하고 있는 특수 상황에 있기는 하지만 세계 모든 나라가 내전 상태에서 벗어나 군사비가 감축되고 있는 현황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든 국민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우리는 6․25 45주년을 맞이하면서 세계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 있는 이 민족에게 통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하겠다. 6․25 같은 민족상잔의 전쟁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주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주시하며 통일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5. 6. 25)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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