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가 1987년 11월 21일 여전도회관에서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된지 만 15년이 되었습니다. 15년이라면 반 세대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발걸음을 한번 재점검해 볼만한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다른 의사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인의협이라는 모임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의사로서 인도주의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각 개인의 힘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모여서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각 개인이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바람직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 서로 반성하고 격려하면서 노력하는 모임이 되자는 것입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각자 나름대로 인도주의적인 의사상을 마음속에 그리며 사회 속으로 나오지만 막상 의사가 되어 사회 속에 들어와 보니 실제로 자기의 생활 속에서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책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학생 때 그렸던 참된 의사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려고 염원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남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신의 부족과 안주하기 쉬운 나약한 인간성에 대한 자성과 도전의 정신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바람직한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변하지 않고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인의협은 개인이 개혁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회원 서로가 각자의 체험을 교환하기도 하고 국내외의 훌륭한 의사들의 사상이나 생애에 대한 연구회를 가지기도 합니다(예를 들어 의과대학생들과 같이 슈바이처의 사상을 연구하는 정기적인 모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흠모하고 따를만한 살아있는 의사의 실생활을 보여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의협에서는 그런 훌륭한 분들을 선정하여 인도주의 의사상(醫師賞)을 드렸습니다. 그동안 여성숙 선생, 신정식 선생, 유경운 선생, 장기려 선생, 한일권 선생 다섯 분에게 시상을 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인의협 사무실에 이들 수상자들의 사진을 걸어놓아 인의협이 그리는 의사상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의료윤리에 관한 정기적 모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료사업(노숙자 진료, 하계방학 진료, 섬 진료 등)도 우리가 현장에서 인도주의를 실천하면서 친교를 도모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의대학생들도 우리와 함께 할 때 젊은 회원을 얻는데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흐름은 우리 의료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제도적인,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도주의를 실천하려면 이 제도적인 문제를 개선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의사들은 하나하나의 질병을 고치는데 만 급급하고 병이 생길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적 요인, 국민 건강 증진에 장애가 되고 있는 사외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방관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숲 전체가 해충으로 침습을 받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가지에 달린 잎사귀 하나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의협은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제도적 문제점과 정면으로 맞서서 그것을 개선하는데 힘을 경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의협은 이미 초창기부터 공해문제(예:진폐증문제), 직업병(예:문송면군의 수은중독 사망의 건, 원진 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대책 활동), 핵문제(피폭자 문제, IPPNW와의 관련) 등의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인의협은 인권 문제(고엽제 대책, 양심수 및 장기수 문제, 고문피해자 문제, 장애인의 문제 등), 의료 제도에 관한 문제(의료보험 문제, 산업재해 문제, 의약분업 문제), 소외계층의 문제(노숙자, 실직자, 섬 주민의 의료 문제), 대 국민 교육 및 홍보 사업(의료 상담, 책자 발간, 매스컴을 통한 교육, 홈페이지 사업, 대북한 활동(북녘어린이 의약품 지원 사업) 등 실로 엄청나게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수행하여 왔습니다. 그 동안 집행부 위원들의 노고는 실로 말할 수 없이 과중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인의협이 벌려온 사업은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여기에 이로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에 많은 정력을 기울였고 또한 국민 건강을 위해서 어떤 의료제도가 적절한 것인가를 모색하고 고민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인의협 회원이 인의협에 가입한 목적은 한편에서는 자기 자신을 향한 자성과 독려를 통하여 인도주의적 의사상을 구현해 보고자 하는 회원이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이 사회의 제도상의 구조적으로 불합리한 점을 개선함으로서 인도주의를 실천해보고자 하는 두 가지 큰 방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회원은 주로 전자를 생각했고 어떤 회원은 주로 후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방법은 각각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전거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이 양자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작동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문제만 생각하다가는 전체적인 큰 문제를 간과하게 되고 제도적인 문제만 중요시할 때에는 자신의 문제까지도 제도에게 다가 전가하는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제도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업을 실천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problem을 identify하는 것)이고 2) 그 많은 문제 중 우선순위가 어떠한가? 3)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하면 될 것인가? 4) 그것이 인의협으로서 해결 가능한 문제인가? 5) 그것이 인의협이 해야하는 문제인가 하는 것을 놓고 회원들간에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어느 단체고 실제로 이끌고 나가는 것은 위임을 맡은 임원들이 하는 일이지만 회원들간에 공감대가 넓을수록 더 많은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 애매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의약분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의료대란을 거치면서 인의협과 일반 의사사회와 사이에는 깊은 괴리가 생겼습니다. 거기에는 참다운 국민건강을 위한 제도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고 또한 적지 않은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의협의 회원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인의협의 입장에 공감하여 새로 들어온 회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회원이 줄은 것에 대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의협의 정신에 찬동하여 남아 있는 회원에 대해서는 그들이 계속 인의협에 남아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즉 인의협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재확인하고 그 것을 기본으로 하여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그 많은 일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초인간적인 노력을 경주해주신 임원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인의협이 이같이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상황에서 지난 3년 임기동안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다음 이사장에게 이사장직을 넘기게 되고 보니 마음이 몸시도 무거운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인의협이 출발할 때 품었던 순수한 이상과 목표를 향해서 힘을 합친다면 우리가 이 민족, 이 사회를 위해서 해야 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의사가 되기 위하여 서로를 격려하면 노력해보고자 맨손으로 나섰던 인의협, 그의 앞길은 좁고 험난한 길일 것입니다.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저항이 있게 마련이고 격려해주기보다는 따가운 시선으로 비판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려다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이사장직을 맡게 될 윤종구 서울대 명예교수는 인의협의 초대 공동대표를 맡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의협에서 계속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특히 인의협내에서 인화를 이루는데 보이지 않는 큰 역할을 해 왔으며 1993년부터 인의협의 고문으로 계십니다. 나와 윤교수가 우연히 둘이 다같은 소아과 교실 출신인데 내가 의과대학 기독교학생회 지도교수로 있으면서 무의촌 진료를 다니는 동안 윤교수는 의대 송천모임의 지도교수로 있으면서 무의촌 진료를 다니며 꾸준히 인도주의를 실천해왔습니다.

    인의협은 1999년 사단법인으로 보건복지부에 등록을 하고 '사단법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로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의협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종래와 같이 운영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사회는 다만 법인체로서의 사무적인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 사회에 개편이 되면서 인의협의 초창기부터 인의협을 위해 애쓰신 분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실무를 맡은 임원들과 이사회 사이에 좀더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종전과 같은 정렬을 가지고 수고해 준다면 인의협은 기필코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조록 선배와 후배들이 머리를 맞대고 현명하고, 용감하고, 헌신적이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함으로써 이난국을 헤쳐나가기를 바라면서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002. 9. 26, 인의협 이사장 이임식)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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