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 옛날 서울대학병원 소아과에 있을 때 치료받든 아기들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던 어머니들이 요즈음 내가 서울중앙병원(현재 아산병원)에 있는 줄을 알고 이곳으로 찾아오는 일이 많은데 이번에는 자기 손자나 손녀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완전히 한 세대가 지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들이 하는 말이 "선생님은 어쩌면 옛날이나 꼭 같으세요. 하나도 늙지 않으셨네요." 물론 이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러 어머니들에게서 같은 말을 듣다보니 진짜 그런가 하고 속으로 좋아해 보기도 한다.

    옛날 친구들을 만났을 때도 “자네 어쩌면 그렇게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나? 무슨 좋은 건강법이라도 있는가? 있으면 좀 가르쳐 주게.”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나는 그들에게 가르쳐 줄만한 아무 건강법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저 웃어넘기고 만다.

    사람이 건강하다거나 장수하는 데는 대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체질이요,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생활습관이다. 그 둘 중에서 중요한 것 이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적 체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가 장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먼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물론 부모로부터 받은 체질을 가지고 얼마나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는가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건강에 알맞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좋은 생활 습관이라는 것은 결국 규칙적인 운동, 알맞은 식사, 체중조절, 금연, 절주, 충분한 수면, 스트레스 해소 등 이미 사람들이 귀가 아플 정도로 듣고 있는 내용이므로 여기서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생활습관 중에서 매일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성북동에서 서울대학병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직장이 가까워서 출근하는데 시간도 얼마 안 걸리기 때문에 아침 출근 전에 성북동 성벽을 따라 산책을 하기도 하고 퇴근 후에는 집사람과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며 운동을 좀 하느라고 노력해보았다. 그러나 이촌동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서울중앙병원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출근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아침 7시면 집을 나서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벌써 저녁 7시가 가까이 되어 운동을 할 시간 여유가 없어지고 말았다. 일요일 하루라도 여유가 있으면 좋은데 일요일은 또 교회에서 대부분을 지내게 된다. 그러다보니 규칙적인 운동이란 별로 하는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미국에 있는 딸이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하여 운동기구를 보내주어서 처음 얼마동안은 그것을 가지고 운동을 좀 해보느라고 했지만 그것은 너무 단조로워서 차차 게을러져 방안에 놓고 보는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누가 와서 보면 내가 건강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일본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수업이 끝나면 모든 학생이 어느 한 가지 운동부에 들어서 운동을 통한 단체훈련을 받아야 했다. 나는 축구부에 한국 선배가 있어서 멋모르고 축구부에 들었는데 얼마나 훈련이 심한지 알 수 없었다. 오후 3시쯤 수업이 끝나면 저녁 5~6시까지 운동장을 뛰어야 했다. 방학 동안에 고향에 가서 쉬다가 개학이 되어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 한 주일 동안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었다.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일본의 고등학교(구제)는 육체적인 훈련도 이같이 지독하게 시켰다. 나는 그 덕택으로 지금도 산을 오르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요즈음 젊은 사람들에 못지 않게 빨리 할 수 있다. 건강관리에 관한 책을 보면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운동을 해야지 과거에 아무리 운동선수를 했다 해도 운동을 중단하면 과거에 한 운동이 소용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고등학교 때 모질게 한 운동이 지금의 내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내 처지가 주어지는 대로 물이 흘러 내려가듯 그저 살아왔다. 주어진 처지에서 마음 편히 살아왔다. 이것저것 따지며 재빠르게 대응하며 동료들과의 경쟁 속에서 악착같이 도전하면서 살아온 일은 별로 없었다.

    육체적인 체질이나 주위의 환경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어느 정도 내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 공연한 도전, 경쟁심은 우리 마음에 스트레스만 준다. 마음이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우리 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어진 처지에서, 주어진 자리에서 마음 편히, 그러나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내 일생을 돌아보면 나는 생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요리조리 따져서 결정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할 때에는 조부께서 평양 숭실학교로 가도록 하라고 해서 나는 별로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조부께서는 옛날 숭실학교의 한문 선생을 하셨고 또 숭실학교는 기독교학교로서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 실력으로는 소위 좀 더 이름 있는 중학교에 갈 수 도 있었을 런지 모르지만 나는 조부의 말씀대로 그저 따랐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구제)로 갈 때에도 수학 선생님이 너는 일본 야마구찌(山口) 고등학교를 가보라고 해서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그 선생 말씀에 따라 그 학교로 갔다. 대학에 갈 때에도 고등학교 선배가 교토(京都)대학으로 오라고 하기에 아무 다른 생각 없이 그저 그리로 정했었다.

    1.4후퇴 때도 그저 밀려 내려가다가 보니 제주도 한림으로 가게 되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의 부원장, 원장이 될 때에도 내가 그런 직을 맡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일도 없었다. 다만 그 당시 병원장이었던 권이혁 박사의 추천으로 부원장으로 되었고 얼마 안 되어 권 박사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병원장으로 되었다. 나에게는 서울대학교병원 같은 큰 병원의 원장이 될 만한 소질이 없었다. 권 총장은 나같이 경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원장으로 시켜놓고 아마도 답답한 일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것이 계기가 되어 서울대학병원에 소아 병원의 건립, 가정의학과의 창설, 병원교회 시작 등 몇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

    나는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하면서 몇 곳에서 오라는 데가 있었으나 이문호 선배가 새로 시작하는 울산의대에 와서 새로운 교육과정을 개발하는데 함께 일해보자고 해서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라 그저 따르기로 하여 서울중앙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울산의대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교과과정을 도입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결혼문제만 해도 그렇다. 학생들과의 모임에 나가게 되면 늘 물어보는 질문이 선생님, 젊어서 연애관계는 어떠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연애를 해본 경험이 없다. 조부께서 중매아비를 통하여 알아 본 여자와 사진 한 장과, 그리고 멀리 앉아서 선을 한번 본 것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학교를 다닐 때 방학 중에 결혼식을 가졌고, 결혼 후에는 방학 때나 서로 만나게 되었다.

    내 자신을 살펴볼 때 나같이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도 드물 것 같다. 사람눈이 어두워 한번 만났던 사람을 잘 알아볼 줄 모르고, 이름도 제대로 따로 외울 줄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단지 부드러운 미소와 들기 좋은 한마디의 말로 사람을 사로잡는다. 이것은 서양 사람들이 더 잘하는 것 같다. 화제에 오르는 배우, 가수, 운동선수들의 이름을 잘 모른다. 주위에서 돌아가는 정보에도 캄캄하다. 직장 안에서 돌아다니는 뉴스도 집사람이 밖에서 들어와 가지고 내게 이야기해서 비로소 아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바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나에게 건강의 비법을 물어본다면 나에게 특별한 방법은 없고 억지로 말하라고 한다하면 이와 같은 ‘바보’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의 편안함이라고나 할까?

    지금 일생을 지나고 나서 회고하여 보면 이렇게 그저 주어진 대로 마음 편하게 살아온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건강을 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주어진 자리에서 마음 편하게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보다 더 건강에 좋은 것 같다.

    그저 주어진 대로 그 곳에서 마음 편하게 , 그러나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살아나가는 것 (盡人事 待天命), 그것이 나의 건강법이라고나 할까?

    (1997. 7)

머리말
그저 주어진 대로 산다
밀알 하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
너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의 길
병의 선용
죽음과 삶
향린의 태동과 초창기의 모습
초점을 가진 교회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함께 싸우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하는 교회
전쟁과의 전쟁
치료와 치유
지구의 암:인간
우리 몸의 지혜
마음의 고향
사랑의 날개
꿈에서나 그려보던 금강산
60년 만에 밟아보는 평양땅
6․25의 회상
미국의 패권주의와 아시아의 평화
시급히 북녘 어린이를 도웁시다
이라크 어린생명들의 비명
“일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세계
야만의 시대
안병무(安炳茂) 형을 먼저 보내면서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
행동하는 양심 -인간 홍근수
서울의대 가정의학과 창립 20주년을 축하하면서
인의협의 반 세대를 회고하며
의대생의 방학동안의 농촌 활동
서울의대 소아과 전공의와의 대화
대한소아과학회의 초창기
낙엽과 더불어
장애(障碍)의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쁨
'평양 어깨동무 어린이병원' 준공에 즈음하여
60년에 되돌아보는 향린의 창립정신
교회라는 공동체
예수님이 계시는 곳
재일동포 인권을 위해 애썼던 이이누마 지로(飯沼 二郞) 교수의 서거를 애도하며
입춘대길(立春大吉)
본회퍼 -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신앙의 선배
박연폭포(朴淵瀑布)
김정애 권사를 생각하며
제주도 피난살이
늙어서 후회되는 일들
예수님과 신앙 선배의 임종
마음의 고향
너의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고향
교회라는 공동체
함께 걸어온 사람들
병과 치유
남은 이야기들
의사의 길을 걸으며
생명을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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